[2012 스토리가 있는 비슬산 둘레길] 세번째 이야기 유가사와 수도암

  • 손동욱기자
  • 2012-12-08 08:45:43
 휘리릭, 승려들의 무술에 왜적의 칼이 젓가락 꺾이듯 부러졌다

#4

대구시 달성군 유가면 양리 비슬산 자락에 있는 유가사. 큰 가뭄이 들 때마다 기우제를 지냈다는 ‘개불 이야기’와
 스님들의 무술인 ‘유가술 이야기’가 전해온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1 개불 이야기

비슬산 지역에 전해오는 ‘개불 이야기’는 유가사 괘불과 관련된 얘기다. 괘불(掛佛)은 특별한 법회나 의식을 행할 때 괘도처럼 만들어 걸어 두는 대형 탱화를 말한다. 괘불이란 말 속에는 ‘걸개를 마련하여 매단 부처’라는 뜻이 있어 고유어라기보다는 일반어이다.

한때 나라에 큰 가뭄이 들었다. 농작물이 말랐다. 불심이 깊던 마을 노인이 ‘개불’이 큰 신통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왔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불상을 재단에 모셔놓고 기우제를 지내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마을의 젊은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다.

“그건 그냥 전설일 뿐이에요.”

그러나 가뭄이 심해지자 걱정들이 터져 나왔다.

“콩이 열리지 않아.”

“논도 말라 터지고 있어.”

마을의 인심이 흉흉해졌다. 굶는 자가 속출했다. 집안의 가축을 하나둘씩 잡아먹기 시작했다. 급기야 내년에 농사 지을 소조차 남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을 젊은이들이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노인을 찾았다.

“어르신, ‘개불’을 모셔서 기우제나 지내봅시다.”

이윽고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나 그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나오지 않았다. 모인 사람들은 며칠 동안 정성을 다해 기도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으나 가뭄을 해결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뜻밖의 반가운 빗방울은 마을 사람 전부를 나오게 했다. 모두 모여 불심과 정성을 가지고 기도를 드렸다. 잠시 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이 큰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라 안의 큰 가뭄은 해결되었다.

이상이 유가사 괘불의 이야기인데, 이후 나라에 큰 가뭄이 들 때마다 괘불을 제단에 모셔두고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마을의 어려움이 있을 때도 이 괘불을 모셔다가 스님과 주민이 함께 빌었다. 산속에서 무서운 짐승들이 자주 출몰하여 가축을 잡아가고 사람을 해치는 일이 흔히 있었다. 이때에도 괘불을 모셔다 대웅전 앞에 걸어놓고 제사를 지내니 다시는 무서운 짐승이 나타나지 않았다고도 한다. 이 괘불은 지금도 남아 있어 평소에는 말아서 상자에 따로 보관하고 있다.

유가사가 인근 주민과 삶의 어려움을 나누고 극복한 사례로 꼽을 만한 얘기다. 임진왜란 때 승병의 활동이 유가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유가사는 사찰이 흥했을 때는 본사를 제외하고 속암이 99개, 거주했던 승려가 무려 3천명이나 됐다고 한다.
 사찰 내부에 있는 수많은 불상만이 옛일을 기억하는 듯하다. 손동욱기자
수도암은 유가사에서 북서편으로 산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자리하고 있다.
 신라 혜공왕 때 도성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손동욱기자
고승의 사리를 안치한 탑인 유가사 부도전(瑜伽寺浮屠殿).
청운당성찬대종사 부도를 비롯해 모두 16기가 안장되어 있다. 손동욱기자
#2 승병들을 단련했던 유가술

유가사에는 스님들이 수련했던 무술인 ‘유가술(術)’이 전해온다고 한다.

유가사의 ‘유가’란 범어 ‘요가’의 음역이다. 유가사란 유가종의 절이란 뜻이지만, 요가로 몸과 마음을 닦으며 수도하는 아름다운 곳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유가술은 요가를 바탕으로 심신을 수련하는 과정이라 추측된다. 유가술이 도저한 경지에 이르면 하늘을 날면서 상대의 맥도 짚고, 손발을 공격하면서 창이나 칼 등을 휘어 꺾는 위력을 갖는다고 한다.

임란 당시 이곳은 승병들의 훈련장이었다. 사명대사는 승병의 영남도총섭이 되어 팔공산 동화사와 비슬산 용연사 등을 주요 거점으로 승병을 지휘했다. 특히 유가사 지역은 골이 깊은 곳일 뿐만 아니라 왜군들이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어 승병 활동의 근거지로 중시됐다.

유가사의 승병 훈련에서는 특히 유가술이 집중 단련됐다고 한다. 유가사를 침입한 왜적들이 천왕문에 들어서자 신비한 힘을 지닌 승려들이 나와서 적들의 무기를 젓가락 꺾듯이 했다. 유가술을 쓴 것이다. 왜적들이 겁을 먹고 줄행랑쳤다. 이 때문에 왜적들은 유가사에 접근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그 후 왜적들이 복수를 하기 위해 불을 질러 웅장했던 유가사가 잿더미로 변했다고 전해진다.

승병을 이끌었던 영규대사와 사명대사의 부도가 유가사 뒤편에 남아 있다.

#3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유가사로 드는 오솔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혀왔다. 그러나 그 길은 숨겨져 있다. 요즘은 옛길 대신 도로가 놓여 그 길이 많이 훼손됐다. 대부분의 방문객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진입로를 통해 차를 타고 유가사를 찾는다. 그러나 유가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숲 속에 숨겨진 길을 밟는다. 오랜 세월 다듬어진 오솔길이 200여m가량 남아 있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난 돌길. 돌들은 숱한 세월 동안 드나든 수많은 신도의 발자국에 닳아 반들반들하게 빛이 날 정도다.

산사를 찾아가는 길은 산간을 흐르는 개울물을 거슬러 오르는 것 같은 마음이 늘 든다. 또는 고즈넉한 여울을 건너는 느낌. 정화되는 듯한 느낌. 유가사(瑜伽寺)에 이르는 길은 더욱 그러하고 그러하다. 예스러우면서도 자연스럽다. 비파와 거문고 소리를 연상케 하는 이름을 가진 비슬산(毖瑟山)을 오르는 신비한 느낌도 마음을 흔든다.

길은 솔숲 속으로 잦아든다. 새소리가 그 길을 깊게 만든다. 푸르스름한 돌길은 감돌고 감돌아서 문득, 새로운 장엄(莊嚴)의 세계, 절로 통한다. 정적의 깊이가 느껴지고, 솔바람 소리의 법음이 끊이지 않는 곳.

돌계단을 오른다. 누군가가 마음 다독이며 쌓아간 돌계단. 얼마나 많은 이가 이 계단을 오르면서 기도의 마음을 삭였을까? 계단을 올라 천왕문 앞에 서면 비로소 마음을 훌훌 털게 된다. 종루 아래로 해서 마당 위에 올라서면 정면 좌우에 나한전과 대웅전이 있다.

절은 안개 속에 있으니 아무 일 없는데
온 산에는 가을빛 붉게 짙어가네.
구름 사이 절벽길 육칠 리나 되는데
하늘 끝 접한 묏부리 겹치고 또 겹쳤네.
차 한 잔 마시고 보니 처마 끝에 달이 걸렸는데
책 읽고 나니 책상머리에 종소리 울리네.
시내에 흐르는 물 나비를 비웃는데
속세에서 묻은 티끌 씻으려다 마네.

고려 때의 문신 김지대(金之垈)가 쓴 유가사 시다. 한적한 산간의 절간 기분이 풍겨난다. 지금도 여전히 유가사는 그런 기분으로 사람을 맞는다.

수도암과 도성암 부속암자로 남아

유가사를 품은 비슬산 정상은 참꽃으로 유명하다. 꽃철에는 전국에서 30여만명이 찾는다. 자연휴양림도 조성됐다. 자연휴양림에서 정상을 넘어 유가사로 통하는 산길이 오랜 옛날부터 있었다. 그 길은 관기와 도성이라는 성인이 서로 부르며 오갔던 ‘그리움의 길’이기도 하다.

유가사를 창건한 이가 도성 스님이라는 설도 전해온다. 신라 혜공왕(765∼780) 창건설과 흥덕왕 때(827) 도성국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때는 유가종의 총본산이기도 했다. 절이 흥했을 때는 본사를 제외하고 속암이 99개, 거주 승려가 3천명이나 됐다. 딸린 전답이 1천마지기에 이르렀다. 과거의 이런 번영을 상징하듯 이 지역에는 유가면이란 행정구역 이름이 붙었다. 사찰 이름을 따 지역 이름을 지은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드물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도 한때 이곳에서 기거했다.

유가사에서 북서편으로 산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수도암이 자리한다. 수도암은 신라 혜공왕 때 역시 도성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암자 주변에는 낙암선사의 비문이 있으며, 극락전 잔디 앞에는 옛 전설을 간직한 거북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비구니 사찰로 1985년 성운 스님이 부임해서 사찰을 중창하여 일신시켰다.

유가사에서 위쪽 1.2㎞쯤 떨어진 비슬산 중턱에 위치한 도성암은 영남지역에서는 가장 유서 깊은 선원 중 하나다. 신라의 명승인 도성국사가 도를 통한 곳으로 전해진다. 암자 뒤 거대한 바위가 도통바위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혜공왕 때 도성국사가 도성바위 굴 아래 절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고려 성종 때 성범대사가 만일미타도량(萬日彌陀道場)을 열고 50여년 동안 수도할 때 상서로운 기운이 여러 차례 나타났다고 한다. 현풍의 20여 신도가 해마다 향나무를 구하여 시주하였더니 향나무들은 밤만 되면 찬란하게 빛을 내 불전을 밝혀주었다는 것이다.

도성암 대웅보전에는 제작연대를 알 수 없는 사명당 영정과 창건주인 도성국사의 진상(眞相)이 있다.


글=이하석 <시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도움말=달성문화원
공동 기획 : 달성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