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의 수어장대앞 마당 모퉁이에는 매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3백 수십 년전, 조선 인조왕때 경기도 광주 유수 이서는 남한산성의 축성 공사를 둘로 나누어, 남쪽은 부하의 이인고에게, 북쪽은 중 벽암에게 각각 분담시키었다.

이인고는 그 날부터 낮과 밤, 일심단성으로 오로지 축성에만 노력하여 돌 하나, 흙 한줌에도 정성을 들여 침식을 잊다 싶이 몰두하였다. 그러는 중에 축성 자금이 부족하였으므로 마침내 자기의 사재까지 전부 던지었다. 그러하였지만 공사를 준공하기에는 자금은 부족해서 공사는 하루 이틀 늦어만 가고 있었다. 그 반면 벽암의 공사는 착착 진행이 되어서 기일 안에 준공하였을 뿐만아니라 관가에서 받은 공사비 중에서 남은 금액까지도 관가에 반납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정직한 이인고는 점점 의심을 받게 되어, "이인고는 사리 사욕을 탐하고 주색에 빠져서 공사를 게을리 한다."는 벽암의 터무니 없이 헐뜯는 말에 의하여 관가에서는 이것을 믿게 되어 불운하게도 그는 수어장대에서 참수형을 받게 되었다.

형을 집행하기 전에 그는 조금도 슬픈 기색이 없이 "신이 죽기는 합니다마는 신이 죽은 뒤에는 그 진부를 알 것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으나, 윗자리에 앉은 이는 이것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곧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었다. 그러자 뻔적이는 칼날에 비참하게도 이인고의 목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 때 피가 흐르는 목에서 한 마리의 매가 날아 나와서 이인고의 시체를 돌고 장대 근처의 바위 위에 앉아 무서운 눈초리로 군중을 흘겨 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것을 본 군중은 이상하여 그 매가 앉아 있던 바위로 쫓아가 보니 매는 없고 다만 발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이리하여 그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관가에서는 실지 조사를 해 본 결과 벽암이 쌓은 성은 한 곳도 정성 들인 곳이 없이 허술하였으나 이인고가 분담하여 쌓은 성은 금성 철벽같고 견고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나중에야 안 관가에서는 많은 돈을 하사하여 수어장대 근처에다 사당을 세워「청량당」이라 하고 그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그런데 이인고 부인 송씨도 역시 남편 못지 않게 충렬한 부인이었다. 남편이 축성비 부족으로 낮과 밤 고심하는 것을 보고는 하루는 그가 남편에게 "멀리 여러 고을을 돌아 다녀서 기부금을 받아 그 축성비를 대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표연히 집을 나선지 여러 달만에 많은 액수의 기부금을 얻어서 이것을 배에 싣고 세밭나루(삼전도)에 다달았을 때, 뜻밖에도 남편이 죽었다는 슬픈 부고를 접하자, 통분한 나머지 한강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다.

관가에서는 그 부인의 충의를 또한 가상하게 여겨 그 강가 언덕 위에 사당을 세워 그 영혼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최상수, *퍼온글 : [한국민간전설집], 통문관, 1958. 3-4쪽.

[출처] 남한산성 매바위 전설|작성자 화백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