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家寶)

瑞峯 김정호 

  매주 일요일 오전 시간에 KBS TV에서 ‘진품명품’이라는 프로가 방영된다. 아내와 같이 즐겨보는 프로그램이다. 각자 소장하고 있는 귀한 물건이나 작품들을 가지고 와서 전문가에게 평가를 받는 프로그램이다. 우리도 저런 귀한 작품이나 물건 하나 없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우리 집안은 선대先代로부터 경상도 상주 땅에서 대를 이어 살아왔다. 조상님들은 비록 농사꾼으로 대를 이어왔으니 큰 부자도 아니었고,  선비 집안의 꼿꼿한 자존심 하나로 그렇다고 소작농처럼 가난에 허덕이지도 않았던 그저 그렇고 그런 집안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다. 4•19혁명이 일어나서 시대가 어수선하던 때였다. 버스를 타고 또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이삿짐에는 웬만한 것들은 전부 버리고 가야 했다. 겨우 이불 보퉁이와 옷가지, 밥그릇과 숟가락만 챙겨서 떠나는 살림이었다. 서울에서 10여 년을 어렵게 살다가 다시 대구로 이사하였다.

  그래도 대를 이어 살아온 집안인데 귀한 물건 하나쯤은 있겠지 하는 마음에서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아! 있다. 그것도 두 가지가 있다. 우리 집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존심 같은 귀한 물건이다.

  첫 번째는 가첩家牒이다. 한지를 몇 겹으로 붙여 병풍 모양으로 접은 다음 손바닥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들었다. 거기에 영헌공 시조할아버지부터 고조부 때까지 24대의 직계를 족보 식으로 적어놓은 것이다. 쉽게 말해서 간이 족보라고 보면 무난할 것 같다. 물론 우리 집안의 족보도 있지만, 증조부님께서 손수 쓰셨다는 가첩을 용케도 잘 간직하고 있다.

  두 번째는 오래된 비취색 도포끈이다. 옛날 선비들이 도포를 입고 겉으로 허리띠처럼 묶도록 만들어진 끈이다. 길이가 2m도 더 되고 양 끝에는 고운 매듭과 호패를 간직하는 고운 수실로 장식되어 있다. 도포는 없고 도포끈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가첩과 도포끈은 모두 증조할아버지께서 직접 만드시고 또한 사용하시던 것이라고 전해진다. 지금 다시 족보를 훑어보아도 조상님들께서 오래도록 큰 벼슬 한자리 하지 못하고 살아온 집안이었다. 그래도 증조부님께서는 대단한 선비이셨나 보다. 조선 시대 말기에 사셨던 증조부님께서는 평생을 벼슬길에 오르지 않으시고 학문에만 열중 하시고 후학을 지도하셨다고 한다. 변명이었을지는 몰라도 하찮은 벼슬살이를 하면 동문수학하던 선비들을 스스럼없이 대할 수 없다 하시면서 평생을 야인으로 보내셨다고 한다.

  반듯한 해서체로 깨알같이 적어 내려간 가첩을 볼 때면 지금도 증조부님의 정성이 묻어나온다. 또한, 색은 퇴색되어 화려하지는 않지만, 아직도 은은한 비취색을 간직하고 있는 도포끈은 증조부님이 손때가 남아 있는 물건이다.

  선조님들이 남기신 보물이란 것들이 어떤 값어치로 매겨질 성질은 아닐 것이다. 단지 그 물건이나 작품 속에 조상의 얼이 담겨 있다면 그 값어치는 충분한 것이다. 우리에게 100년 가까이 고이 간직되어온 가첩 한 권과 도포끈이다. 비록 그것들이 남이 보았을 때는 하찮은 물건 같을지는 몰라도 우리에게는 선비 집안의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며칠 후면 증조부님 기일忌日이 돌아온다. 미수米壽를 눈앞에 두신 아버지께서는 올해에도 가첩을 꺼내보시고 도포끈을 찾아 허리에 매실 것이다. 또한 세월이 흘러 아버지 가시고 나면 나 역시 대를 이어 같은 행동을 하게 되겠지만, 그 다음에는 어찌 될런지…….(2011. 12월 영남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