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나무를 찾아서] <38>경북 청도 상리 돌배나무
먼 발치서도 한눈에 알아 볼 만큼 당당
2009-10-15 [15:32:00] | 수정시간: 2009-10-16 [13:53:34] |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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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청도군 청도읍 상리 염수당 앞에 서있는 돌배나무. 목재가 귀하던 시절에도 문중의 보호를 받아 잘 커온 나무는 올 가을에도 잎사귀 사이로 돌배를 가득 매달고 있다. |
우리나라 봄산에는 흰 꽃나무들이 많다. 산행을 하다가 산비탈에 햇솜처럼 청초한 흰 꽃을 피우고 선 나무를 보면 절로 발길이 멈추어진다. 돌배나무도 그렇게 산비탈이나 고갯마루에 눈에 띄지 않게 홀로 서 있다가 봄이면 있는 힘을 다해 작은 가지 끝까지 꽃을 피운다.
가을에 또 산행을 하던 사람들은 돌배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나무를 만나기도 한다. 탱자 만하게 작은 열매지만 과일이라고 손을 내밀어 한 입 베어 먹어본다. 달고 사근사근한 개량종 배에 길든 입맛은 딱딱하고 시고 텁텁한 돌배 맛에 실망하여 먹을 게 없다며 두어 번 베어 먹다 던져버리기도 한다.
재질 단단해 팔만대장경 목판 사용
돌배 약효 소문 술 담그는데도 인기
우리 토종 배나무인 돌배나무는 이렇게 산 속에서 많이 자라고 마을 근처에서도 볼 수 있다. 과일나무로 노거수가 많지 않은데 경북 청도군 청도읍 상리에 오래된 돌배나무가 있다. 옛부터 많은 시를 남기게 한 배꽃이 부풀어 오르는 사월을 기다려 찾아갔다.
청도에서 화악산 자락을 따라 풍각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한재골이다. 이곳은 청정 산골미나리로 이름난 한재미나리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들이 줄지어 있다. 상리는 한재골에서도 윗마을이다. 마을 입구에서 작은 개울을 지나 좁은 산길을 500m쯤 올라가면 높은 언덕 위에 서있는 돌배나무가 보인다. 감나무 과수원 사이로 먼 빛에 보아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돌배나무는 크고 당당하다. 이 돌배나무는 청도 김씨의 시조인 영헌공 김지대 공의 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염수당 앞에 서있다.
돌배나무라는 이름은 정답기도 하지만 어쩐지 품격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우리말에 '돌~'라든지 '개~'라는 접두사가 붙은 '돌복숭아'나 '개옻나무'등등은 '돌쇠'나 '개똥이'같은 대접받지 못하던 아랫사람들의 고달픈 이미지와 연결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름을 가진 나무들은 번듯해 보이는 개량종 보다 강인한 우리 토종 나무들이다. 요즘 같이 과일들이 아기 머리통만 하게 큰 것들이 나오는데 비해 이런 토종나무의 열매들은 아기 주먹만 하니 하찮게 여겨지기도 하겠다. 그러나 무엇이든 야생에 가까운 것이 제 고유의 성질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법이다. 배 과수원에서도 뿌리 깊은 돌배나무에 접붙여 큰 배들을 수확한다. 그러니까 돌배나무는 근본이 되는 나무다.
더구나 돌배나무는 목재로서 재질이 단단하여 뒤틀림이 없어 목판에 글을 새기기에 좋았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새긴 나무로 산벚나무 다음으로 많은 나무가 돌배나무였다고 한다.
염수당 앞에 서서 한 성씨의 시조 묘를 지키는 돌배나무는 굵은 줄기가 곧바르게 높이 자랐고 사방으로 가지가 균형 있게 뻗어 강건하고 의연한 기운을 풍긴다. 처음 찾아갔던 봄날에는 막 가지 초리에서 둥근 첫 봉오리가 생기고 있는 중이었다. 겨우내 딱딱해 있던 나무에서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봄철에 다투어 피는 다른 꽃들을 찾아가느라 열흘쯤 지나서가니 야속하게 꽃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쉬워하며 염수당 안에 들어가 보니 김지대공의 후손인 청년이 돌배나무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렸을 때 아랫마을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커다란 돌배나무가 집보다 먼저 보였다고 했다. 어둑해져서 돌아올 때 집 밖에 서서 기다리는 어머니를 보는 것처럼 마음이 아늑하고 든든했을까. 이 돌배나무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어느 해 마당을 파는 공사를 했더니 마당 가운데까지 그 뿌리가 뻗어 있더라고 한다. 가을에 돌배가 많이 달려 나무 아래 배가 수북히 쌓여 사람들이 주워가곤 할 정도란다.
가을이 완연해져 돌배나무를 다시 찾아간다. 들어가는 길가 감나무 과수원에서는 마침 수확을 하는 중이다. 대나무 작대기로 영롱한 보석 같은 감들을 따는 중에 툭,툭 떨어진 홍시를 주워 먹으며 나무 밑에 닿는다. 나무는 탱자만한 황갈색 돌배들을 작은 잎새 사이로 주렁주렁 달고 있다. 아래에는 일찍 떨어진 귀여운 열매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다. 사람들이 주워가지 않은 돌배는 벌레들이 배불리 파먹어 구멍이 패였다.
돌배를 주워 한 입 베어 먹어 보니 딱딱하고 단맛이 별로 없다. 지나가던 과수원 주인아저씨가 "서리 맞고 나면 달고 맛있어요."하고 일러준다. 어렸을 때 논밭에 풀 베러 왔다가 이 나무 밑에서 놀았다는 아저씨는 돌배나무 꽃이 피면 아랫동네에서도 훤하게 보였다고 기억한다. 나는 보지 못한 봄꽃을 아저씨의 기억을 따라가며 본다. "메밀꽃이 공중에 한가득 핀 것 같았지요."
요즘엔 큰 배보다 야생 돌배가 약효가 뛰어나다고 해서 돌배술도 담그고 효소도 만든다며 인기가 높아졌다고 한다. 이제 우리 토종 돌배나무의 미덕을 알아주나 보다. 사람들이 가치를 알아주건 말건 200년이 넘도록 자기 고유성을 잘 지켜온 이 곳 돌배나무는 '나는 나'라고 말하는 듯 늠름하다.
글·그림=이선형·시인 andlsh@hanmail.net
출처: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09101300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