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스토리가 있는 비슬산 둘레길] <일곱번째 이야기>산에 둘러싸인 유가면 유곡리

  • 손동욱기자
  • 2012-12-29 07:5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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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란민을 감싸안은 땅 … 그 시절 생명수도 그대로

    달성군 유가면 임도를 따라 관음정사 가까운 산기슭에 있는 석샘. 6·25전쟁 때 이 골짜기로 들어온 피란민들이 많이 이용했고 물이 귀한 시절에는 유곡리 사람들이 식수로 활용했다고 한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1. 유곡1리에서 석새미까지의 둘레길

    비슬산 둘레길은 음리와 양리를 지나 테크노폴리스 조성공사가 한창인 유가면의 동편으로 난 산길로 해서 유곡1리로 이어진다. 이어서 유곡1리의 동남쪽 비슬산과 이어진 산골짜기로 해서 석샘까지 이르게 된다. 테크노폴리스 동편 산록으로 뻗는 둘레길은 추후 닦아나갈 예정이다. 유곡1리에서 석샘까지는 임도가 잘 닦여 있다.

    유가면은 ‘닭이 노래한다(酉歌)’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대구의 달성동(達城洞)처럼 닭의 울음소리에서 전이된 것으로 달성군과 비슬산, 유가면, 쌍계리, 유곡리, 양리(陽里) 등이 모두 닭과 관계되어 불리는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즉, 비슬산은 닭의 머리에 있는 벼슬을 말하며, 유가면은 닭이 노래한다는 의미로 달성과 같은 의미다. 양리는 음리와 대비한 양달이라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닭이 우니 날이 밝아온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고 한다. 물론 ‘유가(瑜伽)’란 유가사란 절 때문에 생긴 지명이라는 설이 더 설득력을 지녀왔으나 이런 설도 경청할 만하다. 닭은 새벽을 알리는 짐승이다. 그런 점에서 유가지역이 밝은 삶터라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유추할 수도 있겠다.

    유가면의 유곡리(油谷里)는 지름실 또는 짐실이라고도 불리어 왔다. 지름이란 ‘기름’의 경상도 방언이다. 현재 유곡 1리 마을 뒤 느리듬바위가 거대한 모양으로 50m가량 계곡을 이루면서 뻗어 있어, 여기에 아침 이슬이나 이슬비가 내리면 햇빛에 반사되어 멀리서 보면 흡사 기름을 바른 듯 윤이 난다 하여 지름실, 짐실, 김실 또는 점실 등으로 불리다가 한자로 바뀌어 유곡이 된 것이다. 이 마을은 고려 말 성주이씨가 마을을 이루면서 정착했다. 임란 후에는 의성김씨가 일가를 이루어 두 문중의 세거지가 됐다. 마을 뒤쪽 비슬산의 지붕 격인 종고봉을 중심으로 꽃밭 등 능선이 뻗어 있다. 남쪽으로는 비름산이 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셈이다. 서쪽으로는 진밤물들, 동쪽은 청도 풍각면, 남쪽은 도의, 서쪽은 예평, 북쪽은 금리에 닿아 있다.

    유곡2리를 이루는 마을들로는 신촌, 외편, 예평마을이 있다. 신촌마을은 유곡리 서남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신촌이라 불리어 왔다. 새장터니, 새담이니 하는 이름이 신촌으로 정착한 것이다. 대구~마산을 잇는 5번 국도변에 유가시장이 생기게 되면서 주민이 늘어나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시장은 다른 데로 옮겨갔고, 대신 유가지서와 유가우체국, 농협, 마을금고 등이 모여 유가면의 소재지 구실을 하고 있다.

    외편마을은 금동 바깥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이름 지어졌다. 외동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후 청도김씨와 월성김씨가 들어와 부락을 형성하면서 금동을 내동이라 하고, 그 바깥에 있다 하여 외동이라 한 것이다. 이 마을 뒷산이 멀리서 바라보면 선녀가 비단을 짜는 형상이라 하여 ‘직금(織琴)’이라고도 했다. 외동마을은 현재 조성 중인 테크노폴리스 지역에 포함되어 새롭게 바뀌고 있다.

    유가1리에서 석샘에 이르는 대산리 임도는 깊은 골짜기를 차로 20분가량 구불구불 올라간다. 완만한 산길인 데다 소나무가 울창하여 걷기에 아주 좋은 길이다. 임도는 석샘을 지나 계속해서 산을 올라 능선길에 이르며, 능선을 타고 청도 각북면 화산리와 수월리로 이어져 각북에서 현풍으로 연결되는 아름다운 길이다. 등산객들이 꽤 이용하기도 한다.

    석샘은 석새미로도 불린다. 골짜기를 내처 오르면 관음정사가 나타나고 절 가까운 산기슭에 샘이 있다. 돌무더기를 사람 키 정도로 쌓아서 그 사이로 물이 고이게 해놓았다. 물의 양은 많지 않으나 골짜기의 물이 고여 들어 맑다. 전쟁 때는 이 골짜기로 피란 오는 이들이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6·25전쟁 때도 이 골짜기에 많은 피란민이 숨어들었다고 한다.


    #2. 병든 아버지에게 젖을 사 먹여 봉양하다

    달성군 유가면 유곡2리에 있는 ‘김처정 및 재령이씨 효열각’. 효자 김처정과 그의 손자 김여택의 처 재령이씨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조선 숙종 때 내린 효열각이다.
    달성군에는 유난히 효와 관계되는 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효’란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도리를 뜻하는 유교의 도덕규범이다. 삼국시대에 국학이 세워지고 유학교육이 이루어질 무렵 이미 유교적 효 사상은 뿌리를 내렸다고 할 수 있다. 고려 말 성리학이 본격 도입되면서 지식인들은 유교적 효 사상을 정치이념의 영역뿐만 아니라 가족생활에서도 실천하려고 했다. 유교적 효 사상을 담은 효행담을 편찬하고 ‘주자가례’를 보급한 것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고려 말기에 권부(權溥)에 의해 ‘효행록(孝行錄)’이 편찬되었으며, 조선시대에도 ‘효행록’이 몇 차례 간행되고, 개찬되기도 했다. 이러한 효행담을 집대성하여 만든 것이 세종대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가운데 ‘효자도(孝子圖)’이다. 조선시대의 효 윤리는 자식이 항상 공경하는 마음가짐으로 부모를 섬겨야 하고, 부모에 대해서는 순종해야 하며, 또 부모를 위해서라면 자기희생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효행은 부모가 살아 계실 때뿐만 아니라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계속되어야 하며, 이 경우 효행은 상제례, 특히 ‘주자가례’에 따른 예제의 실천이 주된 내용이었다.

    달성군 지역에 효와 관련된 사례가 유독 많은 것은 이 지역이 유교적인 기반이 공고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만하다. 유곡리에도 효와 관련된 유적이 더러 보인다. 달창 저수지를 따라 난 달창로를 달리다 보면 바로 길가에 비각 2개가 보인다. 최근에 세워져 깔끔한 ‘김처정 및 재령이씨 효열각’과 조금 떨어진 곳의 ‘고령김씨 효행비각’이다.

    김처정(1603년~?)은 호가 순재(純齋), 본관은 청도다. 재질이 탁월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아버지가 불치의 병으로 30년간 신음하였다. 효성이 지극한 그는 그런 아버지를 하루같이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세는 더욱더 악화되어 음식도 먹지 못하고 20년간 사람의 젖만 먹고 살았다. 어른이 사람의 젖만 먹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말로 설명하기는 물론, 여성들을 찾아가 젖을 구하는 일이 너무나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부탁하기도 어려웠지만, 자식 먹이기에도 급급한 젖을 따로 주는 이가 드물었다. 그래도 그는 모든 곡식과 의복까지 팔아가면서 인근 마을로 젖어미를 찾아다니며 젖을 사다가 봉양하였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지만 아버지를 살리려는 효심에 모두 감동하여 젖을 조금씩이나마 짜주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입맛을 다시기에 김처정이 물었다.

    “아버지, 뭐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신지요?”

    “메추리가 먹고 싶구나.”

    “메추리를요?”

    갑자기 어디서 메추리를 잡을지 막막했다. 그래도 수소문해서 알아볼 요량으로 마당에 내려서자 갑자기 매 한 마리가 마당 위를 맴돌았다. 너무 가까이 매가 날아서 김처정은 긴장한 채 무슨 일인가 하고 올려다보았다. 매는 입에 물고 있던 것을 그의 발 앞에 떨어뜨렸다. 놀랍게도 메추리였다.

    “신기해라. 하늘이 아버지를 위해 보내신 것 같네.”

    그는 기뻐하여 메추리를 잡아 봉양하였다.

    어느 날 누가 “노루고기가 자네 아버지 병에 이롭다네”라고 말했다. 그 말에 그는 안달이 났다. 그러나 어디서 노루를 잡는단 말인가. 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포수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노루를 안고 있었다. 그는 반색을 했다.

    “참 신기하네. 마침 노루가 필요했는데, 이렇게 노루를 보다니. 그 노루를 내게 파시게.”

    포수에게 산 노루를 잡아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올렸다.

    이런 신기한 일들은 이내 소문이 났다. 그의 효성이 지극해서 하늘마저 감동하여 도움을 준 것이라고 모두 말했다. 후에 고을의 선비들이 그의 효행을 적어 장계를 올리니 숙종이 정려를 명하고 빙고별검(氷庫別檢)이란 벼슬을 증직했다.

    김처정과 함께 효열각에 모신 열녀 재령이씨는 김처정의 손자 김여택의 처다. 평소에 효성이 지극하고 부덕을 겸비했는데, 남편이 우연히 병을 얻어 신음했다. 극진히 치료하였으나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그녀는 뒤따라 죽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뱃속에 아기를 갖고 있었다. 아기를 낳고 나서 남편을 뒤따르겠다며 참았다. 마침내 아기를 출산하자, 그녀는 식음을 전폐하고 자진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 효열각은 1699년 고령에 처음 건립된 후 여러 차례 이건하였다가 2006년 현재의 자리인 유가면 유곡리 금동마을로 옮겨졌다고 한다. 유가면 유곡리 1024-9번지(일설에는 유곡2리 739번지라고도 쓰여 있다), 유가면 사무소가 소재한 금동마을 어귀의 삼거리에 있다.

    한편 달성군 유가면 본말리 고령김씨 효행비각도 지나는 이의 눈길을 끈다.

    고령김씨는 효성으로 소문이 났다. 눈먼 시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했던지 고령김씨는 병을 얻어 시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녀의 효심은 죽어서도 기적을 발휘했다. 그녀는 평소 죽어서라도 신령님께 빌어 시어머니의 눈을 뜨게 하리라 다짐했는데, 그녀가 죽고 3년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시어머니가 눈을 떴다.

    이 기이한 기적에 사람들이 크게 감동했다. 고을사람들이 1924년에 고령김씨를 기려 이 비를 세웠다. 원래 이 비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나, 달창지 조성으로 수몰되게 되자 1965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글=이하석<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도움말=달성문화원
    공동 기획 : 달성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