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충원수 묘지명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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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6일 일요일 노경(魯慶)

올해들어 가장 덥다는 오늘, 횡성조씨네의 묘지명(墓誌銘)을 보러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정현일족님의 안내로 목사공종중 관호회장님과 (주)경화엔지니어링 부사장으로 재직중이신 형업일족님, 그리고 필자 이렇게 넷이서 동행을 하였다.
  불볕더위에 교통체증을 피하고자 일찍 다녀오기로 하여 지하철 8호선 복정역에 아침 7시 30분에 만나기로 하였으나 태능역에서 회장님을 만나 서둘러 왔는데도 조금 늦었다.
  도착해보니 정현일족님과 형업일족님은 벌써 기다리고 계시었다.
  형업일족님의 차량으로 바로 횡성으로 향하였다.

  이른 시간이라 길도 훤하고 날씨고 상쾌하였다.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덧 횡성에 도착하였다. 가는 길에 길가 상점에 들러 음료수 한 박스와 조충 원수(趙沖 元帥)의 묘소참배에 올릴 술과 간단한 안주를 샀다.
  그리 어렵지 않게 조충 원수(趙沖 元帥)의 묘지명이 보관되어있다는 횡성조씨망백종친회(橫城趙氏望白宗親會)의 조성진(趙成鎭) 회장님댁(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정암3리 598)을 찾을 수 있었다.

  조충 원수(趙沖 元帥)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시조공께서 1218년 스물아홉의 나이로 참전한 거란전투를 승리로 이끈 횡성조씨의 8세손으로, 조정으로부터 문정공(文正公) 시호를 받으신 인물이시다.
  익히 아는바와 같이, 조충원수는 상기 전투에서 시조공의 방패에 적힌 '충효쌍수'의 '순두시'를 보고 감탄하여 시조공을 발탁(拔擢), 기용(起用)하시었으며, 고종(高宗)6년(1219년) 5월 과거시험의 총책임관인 지공거(知貢擧)이었고 시조공은 바로 이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하시었으니 기실 인연도 보통인연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조충원수의 묘지명이 전해내려오는데 바로 그 묘지명에 시조공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기에 그 묘지명을 보고자 불원천리(不遠千里) 달려온 것이다.

  묘지명은 무덤의 주인이 누구이고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후세에 전하기 위해 무덤 안에 넣은 기록물이다. 묘지명의 주인이 수십,수백년의 세월이 지난 뒤 후손들한테 띄우는 편지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묘지명은 고려시대부터 보이기 시작하며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훨씬 많이 만들어지고 그 형태도 다양하다고 하나 고려시대의 묘지명이 보다 더 가치가 있고 큰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고려시대의 역사와 삶을 전해주는 자료 자체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일반적인『고려사』등의 문헌 자료에서 볼 수 없는 생생한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조충원수의 묘지명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나무로 짠 상자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운 것은 묘지명이 온전히 보전되지 못하고 4개의 조각으로 깨어져 있다는 것이다.
  조성진 회장으로부터 이 묘지명이 이렇게 깨어진 상태로 전해온 내력을 들을 수 있었다.

  당초 조충원수의 묘소는 개풍군(지금의 개성)에 있었는데 왜놈들이 도굴해가면서 부장품들 중에 지석은 무거우니까 내던지고 갔다고 한다. 하루는 그 마을에 사는 머슴 한 사람이 나무하러 갔다가 지석을 발견하고는 술이나 바꿔먹을 요량으로 지게에 지고 마을로 내려온 것을 최씨성를 가진 사람이 심상치 않게 여겨 동강난 묘지석(墓誌石)을 살펴보니 예사 물건이 아니다 여겨 머슴에게 막걸리값을 쥐어주고 보관하였다가 조충원수의 후손을 찾아 횡성군 망백에 연락이 닿아 찾게 되었다고 한다.

  상자의 뚜껑을 여니 소중히 보관하여 온 묘지명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4개의 조각으로 깨어져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눈앞에서 그 모습을 보니 참으로 안타깝다. 정말 온전히 보존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조충원수의 묘지명은 두께 약 2~3센티미터의 석판에 섬세하고 예리(銳利)한 필체(筆體)로 음각(陰刻)한 것이다.
거의 800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묘지명의 글짜들은 너무나 선명하여 마치 필체좋은 선비가 세필(細筆)로 이제 막 써내려 간 듯하다.
  묘지명 석판의 색깔은 오석(烏石)인듯 검고, 돌의 결은 고우나 무른 재질로 보였다.
  석판의 글은 예리한 칼로 새겨져 있어 글자들이 살아있는 듯 하고, 아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음각된 부분이 약간 붉은 빛을 띠고 있다.
  성진회장님의 말씀에 따르면, 석판 위에 물을 부으면 전체적으로 붉으스레 해진다고 한다.

  조충원수의 묘지명중에 시조공의 휘(諱)가 언급된 부분은 하단 가운데 부분으로 다음과 같다.

 『... 是年拜政堂文學判禮部事又知貢擧得金仲龍等二十八○○○○...』
 『... 시년배정당문학판예부사우지공거득김중룡등이십팔○○○○...』

  즉, '이해에 정당문학판예부상서의 벼슬을 제수받고 지공거(과거시험의 수장)가 되어 김중룡 등 28명을 급제시켰다'라는 내용이다.(김정현(金丁鉉),『청도김씨사』,도서출판고산자의후예들, 2003, p.25.)

                                                                   묘지명중 시조공의 휘(諱)가 새겨진 부분

조충원수는 시조공이 장원급제 하였던 그 다음해인 고종 7년(1220) 9월에 졸(卒)하였다.
이 묘지명 역시 그 당시에 씌여진 것으로 볼 때 지금으로 부터 약 780여년 전의 것이다.
나는 나도모르게 시조공의 휘(諱) '金仲龍' 세글자가 새겨진 부분을 검지의 온 촉각을 곤두세워 만져보며 마치 시조공의 유품을 만지는듯한 착각에 빠졌다. 시조공의 숨결이 800년 세월을 건너뛰어 바로 눈앞에 그리고 손끝에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한 감흥(感興)도 잠시, 예까지 왔으니 조충원수의 묘에 가보자는 말에 정신을 차려 자리에서 일어나 묘소로 향하였다. 묘소는 조회장님의 집에서 과히 멀지않은 곳에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잘 다듬어진 잔디와 묘지의 석물인 석양을 비롯하여 망주석, 문인석 등이 어우러져서 기품있게 꾸며진 묘소이다.

  처음 묘를 쓸때에는 봉분 주위에 곡담을 두르고 묘소 입구도 돌계단으로 하자는 말도 있었으나 자연친화적인것이 좋다하여 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우리는 준비해간 안주에 술한잔을 올리고 다같이 절을 하였다.
  비록 우리의 조상은 아니나 시조공을 처음 발탁하여 중히 기용하여 함께 전쟁을 치렀으며, 후일 한분은 과거시험의 수장으로 한분은 시험생으로 만나 장원급제하여 그분의 묘지명에까지 이름이 올랐으니 어찌 시조공의 후손으로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간단히 참배를 마치고 조충원수의 아버지인 문경공(文景公) 영인(永仁)과 그의 아들인 광정공(光定公) 계순(季珣) 이렇게 세분 삼원수(三元帥)의 위패를 모셨다는 세덕사(世德祠)로 향하였다.
  세덕사 역시 조회장님의 집에서 멀지 않은 덕고산(德高山) 초입에 있었다.
  당초 덕고산 일대가 거의 다 횡성조씨 종산이었는데, 덕고산 기슭 1만5천 평을 청소년 야영장 등 레포츠 공원으로 횡성군에다 희사했다고 한다. 세덕사는 레포츠공원으로 올라가는 나들목 안쪽 너른 마당에 있었다. 정문을 들어서자 동재와 서재 두 채가 동서로 마주보고 섰고 그 뒷편으로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마당에는 잔디를 깔아 고아(高雅)한 정취가 느껴지는 사당이었다.

  사당을 둘러보고 나니 그야말로 더위가 절정이었다.
  이미 점심때가 다 되었으나 근처에 마땅한 식당도 보이지 않고 형업일족님의 차에 오르자 에어콘이 시원하여 그냥 서울올라가서 먹자고 하여 서울로 향하였다.
  복잡한 길을 피하여 상경하다보니 용인을 지나게 되었는데, 갑자기 정현일족님이 근처에 포은 정몽주의 묘소가 있으니 들려가자고 하여 내친김에 정몽주의 묘소에 들렸다.

  포은 정몽주는 너무나 유명한 고려말의 충신으로, 공민왕 9년에 원정공의 아들인 김린(金潾)및 김린의 4촌인 김희(金禧)와 함께 급제한 인물이다. 이렇게 4촌간에 동시에 급제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로, 당시 같이 방(榜)에 오른 인물이 바로 수석합격한 포은 정몽주이며, 목화씨를 전래한 문익점, 시문에 능한 이존오 등이 있었다. 즉, 포은 정몽주는 우리의 7世 할아버지인 김린(金潾), 김희(金禧)와 함께 급제한 인연이 있는 인물이어서 겸사겸사 들른 것이다.

 

포은 정몽주 묘소 전경(全景)

 

포은 정몽주 묘소

  정몽주 묘소까지 참배를 하고나니 이제 점심때가 훌쩍 지나 서둘러 음식점을 찾아 늦은 식사를 하였다.
  더운 날씨에 고생은 하였지만 시조공의 숨결이 느껴지는 묘지명도 보고, 정몽주 묘소도 구경하였으니 정말 의미있는 하루가 아닐 수 없다.

  뜻있는 답사여행을 추진하여 주신 정현일족님, 시원한 냉면과 만두에 소주로 속을 풀어주신 관호회장님, 하루종일 운전을 하시느라 고생하신 형업일족님께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