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수많은 효자 열부, 우리 곁에 있다(2)

심후섭 대구시달성교육지원청 교육장

우리 둘레에 많이 자리하고 있는 효자 효부비는 오늘날 우리들의 불효를 조용히 꾸짖고 있다.
테크노폴리스 조성 공사로 한창인 유가면 유곡리에 가면 `김처정과 재령이씨 효열각’이 외로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공사가 진행 중인 관계로 옛날에는 마을 한복판이었으나 지금은 들판이 된 이곳에 쓸쓸히 서있는 것이다.

청도김씨(淸道金氏)인 김처정(金處精)은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불치의 병으로 30년간 신음하였으나 하루같이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나중에는 병세가 위중하여 음식을 먹지 못하고 사람의 젖만 먹을 수 있었으므로 20년간을 한 결 같이 인근마을로 유모를 찾아다니며 젖을 얻어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가 메추리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였다. 김처정은 메추리를 구하려고 사냥꾼을 찾아갔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종일 걱정하고 있을 때에 마침 지나가던 매가 자신이 잡은 메추리를 마당에 떨어뜨려 주었다고 한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김처정이야 말로 하늘이 낸 효자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에 나라에서도 김처정이 지극한 효자임을 알고 정려(旌閭)를 내렸다. 그리고 김처정과 함께 정려된 열녀 재령이씨(載寧李氏)는 김처정의 손부(孫婦)로서 평소에 효성이 지극하고 부덕(婦德)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우연히 병을 얻어 신음하자 극진히 치료하였으나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그녀는 뒤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뱃속에 아기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죽지 못하였다. 그 뒤, 상(喪)을 마치고 출산한 다음 식음을 전폐하여 마침내 남편의 뒤를 따라갔다.

남아있는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 남편을 따라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할 듯싶으나, 남편을 잃은 그 슬픔이 너무나 극진하였기에 마침내 그 뒤를 따른 것이 아닐까 한다. 이 문제는 우리 학생들에게 토론 자료로 주어서 재령이씨의 행동을 되짚어보게 한다면 좋은 교육 자료가 될 것이다.

그 뒤, 숙종 임금 때에 효자 김처정과 열부 재령이씨의 깊은 뜻을 헤아려 나라에서 이 효열각을 세워준 것이다. 이 효열각에서 가까운 구지면 응암리에는 `제갈남학효자비각’이 서있다. 이 비각은 호는 필암이요, 자는 성옥인 제갈남학의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1937년 마을 입구에 세워졌다고 한다.

제갈남학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은 부모에게 어두운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고 아무리 살림이 어려워도 늘 웃는 얼굴로 부모님을 대하여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실이 아무리 각박하더라도 웃는 얼굴로 살아간 선인들의 지혜와 인품에 대해 고개를 숙이게 된다.

가창면 행정리에는 `송병규 효자비각’이 서있다. 송병규(宋炳圭)는 조선 고종 때에 경연관(經筵官)을 지냈으며 문익공(文益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머니가 병으로 누워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수혈로 회생케 하였는데, 3일후 다시 모친의 병환이 위독하게 되자 또 나머지 손가락을 끊어 수혈함으로써 3년을 더 생존케 하였다고 한다.

한 번도 힘들 텐데 두 번이나 손가락을 잘라 부모를 살리고자 한 자기 희생정신을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 것인가? 뿐만 아니다. 송병규 선생은 어머니를 여의고 실의에 차있던 중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나라를 잃게 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항거하였다. 이에 나라에서는 다시 정려문을 세워 선생의 효성과 충절이 후세에 길이 빛나도록 하였다.

우리 둘레에는 이처럼 강직한 충신과 인륜의 도리를 다한 효자들이 많았다. 효자는 효자로서 그치지 않고 이웃에게 사람으로서의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스승의 역할도 하고 있다. 지금 우리들은 과연 그들을 얼마나 생각하고 또한 본받으려 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입력시간 : 2012-03-21 15:20:05

출처 : 대구신문 http://www.idaegu.co.kr/list/gisa.html?uid=245384&key=%BF%C0%C7%C7%B4%CF%BE%F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