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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수당(雙修堂)의 무궁화

[2013-02-04 오전 10:51:00]
 
 
 

 쌍수당은 경남 밀양시 청도면 두곡리 361번지, 국도24호선(광주-울산)을 타면 밀양땅 서쪽 끝 지점에 삼면이 산자락에 싸여있는 아늑한 마을에 자리 잡은 경남 문화재 자료 제229호이다.

국도라 해도 편도 1차선이면 제한속도는 시속 60km라 했는데 벌써 65km로 달리기 시작한 필자의 계사년이 벌써 한 달이 기울어 가는 오늘 쌍수당에 올라 보는 감회가 또 다르다.

남계서원(南溪書院) 대강당 쌍수당 기둥에 걸린 주련을 서툴게 해석해 보면서 쌍수당 세 글자 밑에 옷깃을 여미고, 이런 문화재를 남겨주고 가신 선현들의 심중을 헤아려 보고자 하나 너무나 깊고 넓고 높은 뜻이라 감당 할 수가 없다. 

조선중기 청도군수를 거쳐 공조판서까지 지내신, 문헌공 윤봉구(1681~1767) 선생이 ‘쌍수당’이라 이름 짓고 중건기문을 남긴 이 집은, 청도김씨(淸道金氏) 시조(始祖)이신 오산군(鰲山君)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1190~1266)선생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704년에 고을의 사대부들이 의논하여 창건하여 후예들의 학문을 강학하던 집으로, 세월의 굴곡에 상처도 많았으나 후손들의 성심으로 비바람 다 견디고 조국의 만세번영을 내다보며 오늘도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면 오산군 영헌공은 이 세상에 무슨 위대한 업적을 남겼기에 고을 사대부에서 선비들까지 합심하여 사당을 짓고 춘추 제향을 올리며, 서원을 열고 그 유업을 이어 받고자 하였던가를 살펴보자. 신라 천년의 성골(聖骨;박,석,김) 중 김씨왕손으로 고려명종20년(1190)에 탄생하여 고려원종7년(1266)까지 77년 생애에 50년간 문무장상(文武將相)을 지내며 나라에는 충성을 다 바치고 부모에게는 효성을 다한 덕업이 천하에 들어났기 때문이다.
 

먼저 ‘쌍수(雙修)’의 어원을 따라가 보자. 이는 영헌공께서 태학사(대학생)때인 1217년에 걸안족 3만 대군이 서북방 강동지방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하였다. 이때 병석에 계시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전쟁터로 나가면서, 방어용 방패에다 ‘국환신지환(國患臣之患), 친우자소우(親憂子所憂), 대친여보국(代親如報國), 충효가쌍수(忠孝可雙修)라는 시한수를 써 붙였다.

 

공격용 창칼과 방어용 방패를 준비할 때, 다른 병사들은 적군에게 위압과 공포를 주고 기세를 잡기 위해 방패에다 흉악한 그림이나 사나운 짐승을 그렸지만, “국가의 어려움은 신하의 어려움이요, 어버이의 근심은 자식의 근심 할 바이니, 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에 보답한다면, 충성과 효도를 둘 다 할 수 있네”라는 글을 썼으니, 원수(元帥) 조충이 출전준비 점검을 할 때 이를 보고 감탄하였다.

그 무기와 방패를 들고 적진에 나아가 싸울 때는, 아무리 무식한 적장이라 해도 방패의 글을 보고 감히 선생을 해하지 못하였다하니 오랑캐도 효도와 충성은 아는 법이라 비겁하게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자 해가 바뀌고 조정에서 관리를 뽑는 과거를 실시할 때, 원수(元帥)였던 조충이 시험관의 총수(總首)인 지공거가 되었다. 이때 일등으로 발탁되어 전주사록(全州司祿)을 임명받아, 관직에 나아간 선생의 시에 나타난 ‘나라에 충성도 하고 부모에 효도도 할 수있다‘ 는 ‘쌍수’가 800년을 흘러온 지금도 지지 않는 무궁화 꽃이 되어 쌍수당에 피어있다.

어찌 이뿐인가, 선생께서 전라도 안찰사로 있을 때, 최우의 아들 만전이 진도에 숨어서 횡포를 부리고 수하인 통지라는 사람을 보내 온갖 요구를 다해 왔을 때 한번은 들어 주었으나 또 다시 방자하게 굴므로 통지를 결박하여 강물에 던져 기강을 바로잡기도 했다. 한편 1241년 진주목사에 피임되어 촉석루를 창건하기도 하여 아름다운 촉석루 전경이 쌍수당에 걸려 있다.

1258년 몽고병이 북쪽 변방을 침입할 때 첨서추밀원사에 승진하여 파견되니 서북 40여 성읍이 편안하였다. 1260년 고려원종1년에는 정당문학이부상서(政黨文學吏部尙書)에 오르고, 이듬해는 지추밀원사로서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자 조정에서는 수태부 중서시랑 평장사(정2품)에 올리고 오산군(鰲山君)에 봉했다. 영남의 작은 고을 청도에서 조정의 정승반열에 오르기까지, 문무를 넘나들며 내직 외직 가리지 않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동분서주한 선생의 가르침은, 새 시대 질 좋은 일자리를 열망하는 젊은 세대가 쌍수(雙手)로 받아 모셔야 할 문화유산이다.
(사진: 남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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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공/밀양문화원향토사연구소

기사출처:http://miryang.newsk.com/bbs/bbs.asp?group_name=407&idx_num=10817&ex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