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왕설래]가문의 영광

친밀감을 결속하는 구심체는 문화권마다 다르다. 힌두문화권에서는 카스트(계급)의식, 한국 같은 유교문화권에서는 혈연의식, 미국을 비롯한 기독교문화권에서는 클럽 의식이 강하다. 유교문화권의 혈연의식은 ‘족보(族譜)’가 상징적이다. 족보는 한 가문의 혈통관계를 기록한 책이다. 중국에서는 ‘宗譜(종보)’, 상류계층에만 족보가 보급된 일본에선 ‘家譜(가보)’라는 이름이 많이 쓰인다.

물론 가계를 중요시하는 일이 유교문화권의 전유물은 아니다. 유럽의 명문대가에는 동양권 못지않게 발달된 족보제도가 전해온다. 다만 가계를 나무에 비유해서 ‘Family Tree’라고 부를 뿐이다. 이스라엘 민족 역시 족보를 소중히 했다. 성경 곳곳에 잘 나타나 있다. 룻기(4장 18∼23절)와 마태복음(1장 1∼16절)에는 선조에서 자손으로 내려가는 순서로 가계를 기록했고, 에스라(7장1∼5절)와 누가복음(3장23∼38절)에는 반대로 자손에서 선조로 올라가는 순서로 소개하고 있다.

요즘 족보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서양 쪽에서 더욱 커지고 있다. 미국족보학회는 창립된 지 80년이 넘고, 본부가 위치한 유타주에는 세계 각국의 족보가 소장된 족보박물관도 있다. 특히 하버드대에는 한국의 족보들을 모두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하고 있어 방문객을 놀라게 한다. 한국 족보는 계층에 관계없이 보편화된 데다 기술 방법 또한 체계적으로 잘돼 있기에 그렇다. 비조·시조·중시조, 대대로 이어지는 세계, 항렬자와 별호, 사위까지 소개하는 족보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족보를 귀하게 여겼다. 하긴 ‘난리가 나서 피난갈 때도 족보는 챙겨 간다’는 옛말이 있지 않은가.

재직 시 받은 표창장에 적힌 ‘주사보’ 직급을 ‘사무관’으로 바꿔 쓴 뒤 사진을 촬영해 문중 족보편찬위원회에 제출한 퇴직 지방행정직 공무원이 공문서 변조 등 혐의로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할아버지의 존함조차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세태에 비추어 볼 때 조상의 얼을 기리고 가문의 화합을 다지는 구심체로서의 족보가 가진 퇴영적 이면이다. ‘가문의 영광’을 지나치게 의식했던 것 같다.

황종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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