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중이 하사한 땅 120억 보상금…70억 행방 묘연

 

종중이 하사한 땅 120억 보상금…70억 행방 묘연

[중앙일보]입력 2013.03.30 00:44 / 수정 2013.03.30 09:08  

피보다 진한 돈, 종중 땅 잔혹사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라지만 조상이 물려준 땅을 후손이 말아먹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남보다 더 먼 원수가 됐죠.”

 종친들과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는 연안 이씨 연성군파 종중회장 이창영(66)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건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 종중회장 A(78)씨 등 3명은 2005년 경기도 용인의 임야 23만1400㎡(약 7만 평)를 종중회 공금 45억원에 사들인 뒤 종중회에는 67억원에 샀다고 보고해 차액 22억원을 빼돌렸다. 이 사건으로 A씨 등은 지난해 7월 검찰에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A씨 등이 쓴 공금은 2004년 판교신도시 개발로 종중 땅 4만 평이 한국주택토지공사와 성남시에 수용되면서 받은 120억원 중 일부였다.






 

사라진 70억원의 행방


 

이 땅은 1506년(중종 1년) 중시조인 연성군 이곤이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땅이었다.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왕으로 세운 반정의 공신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500년 넘게 내려오던 땅은 향토 유적으로 지정된 일부 묘역을 빼곤 모두 고층 아파트촌으로 바뀌었다. 100억원이 넘는 토지 보상금이 나왔지만 현재 종중에 남은 돈은 한푼도 없다. 용인 임야를 사고 남은 70여억원의 행방도 묘연하다. 종중회 측은 A씨 등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해 30억원을 돌려받을 수 있는 판결을 얻어냈지만 실제로 회수한 돈은 없었다. A씨 등이 이미 재산을 다른 곳으로 빼돌려 놓았기 때문이다. 민사소송을 수년 동안 이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 회장은 “종중 재산을 어렵게 찾는다 한들 내 개인 몫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다른 종친들이 잘 나서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처럼 종중 땅이 각종 개발사업에 따라 많은 보상금을 받을 수 있는 금싸라기 땅이 되면서 후손들 간에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지난 5년(2008~2012년)간 종중 땅과 관련해 보상을 한 건수는 958건에 달한다. 지역별로는 경기도가 385건으로 40% 이상을 차지했고 전북(82건)-충북(73건)-충남(72건) 순으로 많았다. 건당 평균 보상액은 9억3000만원이었는데, 인천(21억500만원)과 경기도(15억6300만원) 등 수도권 지역의 보상액이 평균을 크게 웃돌았다. 이러다 보니 땅을 둘러싼 소송이 끊이지 않는다. 종중 사건을 전문적으로 맡아온 이재진 변호사는 “우리 사무실만 해도 한 해 서너 종중에서 10여 건의 사건을 의뢰한다”며 “수원·화성·용인 등 개발 호재를 탔던 경기 남부권 땅이 많다”고 말했다.
 

명의신탁이 화근

종중 땅을 놓고 분쟁이 생기는 것은 대부분 종중 명의로 등기를 하지 않고 개인 이름으로 등기하는 ‘명의신탁’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재산세를 걷기 위해 개인 명의로 등기를 하도록 강요한 데서 비롯됐다. 명의자인 종중원이 사망했을 때 새로운 명의자를 찾아야 하는데 이때 정확한 근거 자료를 남기지 않고 서로 믿고 하자는 식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훗날 명의자가 마음을 바꿔 본인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땅을 팔아버리기도 했다. 이를 다른 종중원이 알게 되고 종중 땅이라는 증빙자료가 있더라도 원 상태로 회복하기엔 시간이 너무 지난 뒤다.
 

 탐진 최씨 천곡파 종중에서 벌어진 사건이 좋은 예다. 이 종중은 광주광역시 도천동의 땅 3만9700㎡(1만2000여 평)를 종중원 7명 명의로 신탁관리해 왔다. 2002년 일부 종중원이 수천만원을 챙겨주겠다며 다른 명의자들을 매수해 명의를 넘겨받은 뒤 이 땅을 팔아버렸다. 종중회 측은 땅을 매각한 이들을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소송을 제기한 회장이 절차에 맞게 선출되지 않아 대표권이 없다”는 상대 측 주장을 받아들여 소를 각하했다. 4년여간 소송을 이끌어온 회장이 사망하면서 땅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은 흐지부지됐다. 전 종중회 임원 B씨는 “이 동네 사람들은 우리 종중 땅이라는 것을 다 안다”며 “이미 이리저리 쪼개져 팔린 땅을 찾을 길이 없다”고 한탄했다.
 

골프장 개발로 조상묘도 훼손
 

땅 처분을 결정하는 총회 개최나 종중회장 선출 과정에서 종중 정관에 명시된 규정을 제대로 지켰는지를 놓고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골프장 개발업체 S사는 2009년 강원도 홍천의 모 종중 소유 땅 18만1800㎡(약 5만5000평)를 매입했다. 그런데 공사가 한창이던 2011년 종중원 93명은 “소수 종친의 토지 매각은 무효”라며 소송을 냈다. 땅을 팔 당시 종중회가 전체 종중원 130여 명 중 41명의 동의만 얻어 땅을 팔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중회 임원은 “당시엔 종중회가 활성화되지 않아 연락할 수 있는 종중원에게 모두 연락했지만 50여 명만 모였다”며 “소송을 제기한 사람들 중엔 당시 동의했던 종중원들도 포함돼 있다”고 반박했다. 묘지 이장 문제는 갈등을 더 키웠다. 봉분만 남겨두고 산을 깎는 공사가 진행되면서 흙 기둥처럼 솟아 있던 묘지 15기가 사라지거나 훼손된 것이다. 업체 측은 “종중 대표들로부터 적법하게 토지를 매입했다”며 “묘지 연고자들에게 여러 차례 이장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더는 공사를 지체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 총회를 열 때 여성을 빼고 남성 종중원에게만 알렸다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법원은 이미 2005년 여성을 종중원으로 인정한 바 있다. 용인 이씨 사맹공파 종중은 임야를 350억원에 팔아 성년 남자에게는 1억5000만원씩 지급하면서 미성년자와 출가한 여성 등에게는 각각 1650만~5500만원을 지급했다. 이에 출가한 여성 5명이 종중회를 상대로 종중회원 확인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종중원 자격을 성인 남자로 제한한 것은 개인 존엄과 양성 평등의 법질서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성과 본이 같으면 성별과 무관하게 종중원이 돼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재진 변호사는 “원래 종중은 조상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존재했지만 출가한 여성을 종중원으로 인정한 것은 종중이 상속을 위한 개념으로 변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종중 분쟁을 줄이려면 총회 등 절차에 대한 정확한 법률 조언을 받으라고 권한다. 법무법인이 총회 소집을 대신 통지해 주는 서비스도 등장했다. 또 절차대로 종중 재산을 처분한 뒤 공동 관리하는 것보다는 최소한의 분묘나 납골당만 남기고 나눠 갖는 것이 갈등의 소지를 없앤다는 일부의 의견도 있다.


  “우리 대에서 나눠 먹으면 안돼”
 

모든 종중이 공동 재산을 놓고 갈등하는 것은 아니다. 거액의 보상금으로 장학재단 등 사회적 사업을 하는 종중도 있다. 경기도 용인에서 350여 년간 종중 전통을 이어온 경주김씨 참관공파 하갈종중은 2000년대 초 종중 땅 16만5300(5만여 평)에 대한 보상금 60여억원을 받았다. 종중은 이 돈으로 기금을 조성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임야 23만1400㎡(약 7만 평)와 600여 기 규모의 납골묘를 마련했다. 기금 일부는 종중원들의 복지를 위해 썼다. 종중의 65세 이상 노인들에게는 월 20만원의 생활보조비를 지급하고, 아이를 낳은 종중원에게는 출산장려금 150만원을 준다.

종중의 고등학생과 대학생에겐 매년 60만~150만원의 학비도 지원한다. 종중원뿐 아니라 지역의 어려운 고등학생 15명에게 한 해 60만원의 장학금도 주고 있다. 또 종중회관으로 산 5층짜리 건물에서 임대수익도 얻어 종중 운영을 하고 있다.

 많은 종중원을 설득해 보상금을 투명하게 운용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시 종중회장이던 김학민(63)씨는 "많은 오해를 받으면서도 400여 명의 종중원을 일일이 찾아다녔다”고 말했다. 수천만원씩 돈을 나눠 갖는 데 관심이 많았지만 김씨는 “지금 나눠 가지면 종중은 해체되고 말 것”이라고 설득했다. 수백 년 전 조상이 내려준 땅을 후손들에게 물려줘야지 우리 대에서 나눠 먹는 것은 옳지 않다고 김씨는 믿고 있다.

김소현 기자

 

◆종중=공동 선조의 분묘를 보존하고 제사를 지내며 후손 간 친목을 다지기 위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가족단체다. 성과 본이 같은 하나의 종족 전체를 총괄하는 대(大)종중 안에 크고 작은 분파로 나누어진 종중이 있는데, 이 같은 지류(支流) 종중을 문중이라고 한다. 종중이 규약이나 관습에 따라 대표자를 선출하는 등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면 비법인 사단으로서의 단체성이 인정된다. 이에 따라 민사소송의 당사자로 인정되고 종중 명의로 부동산 등기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