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김씨 중시조 묘는 전형적 와혈 명당 풍수

2013/01/19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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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대사가 점혈한 명당을 찾아서… 묘역 조성과정서 현릉 손상 안타까워

 

풍수인 성지대사가 점혈한 곳에 바로 대구 근교 청도 김씨 중시조가 모셔져 있다. 이번에 이곳을 답사했다. 청도 김씨 시조는 경북 청도읍 상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중시조의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군 청천면에 소재하고 있다.

 

성지(聖智·?~1623)대사에 대한 자세한 문헌은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경북 군위군청에서 보존하고 있는 자료와 역사적인 참고 자료에 의하면 그는 경북 군위군 소보면 봉황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남양 홍씨다. 용궁현감을 지낸 홍석귀의 서얼(庶孼·첩의 자식)이다. 15세에 경북 군위군 소보면에 지금은 없어진 월영사에 입산수도하여 출가했다가 훗날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대가가 된 분이다.

 

설화에 의하면 홍성지가 서당을 다니는 길에 여자로 변장한 여우가 매일 밤 나타나 구슬을 자기 입에 넣었다가 성지 입에 넣었다가 하는 것 때문에 성지가 쇠약해지는 것을 알아차린 후 훈장이 “구슬을 입에 넣어 주면 삼켜 버리고 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내려다보라”고 일러 주었다. 다음 날 여자로 변장한 여우가 나타나 입에 넣어주는 구슬을 삼키고는 하늘을 쳐다보는 것을 잊고 땅만 쳐다보았기 때문에 지리에 도사가 되어 명풍수가 되었다고 한다.

 

성지대사는 두뇌가 명석하고 뛰어난 추진력을 가진 분으로, 임진왜란 후에 우리나라 궁궐을 복원하신 분으로도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 왜병들에 의해 궁궐이 모두 불타 버린 뒤 광해군은 성지대사에게 궁궐을 복원하도록 명했다. 이것은 사전에 성지대사가 명풍수로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이때 성지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자리를 잡았다. 실학자이며 풍수지리에도 능숙한 박상의(朴尙義)와 김일룡(金馹龍), 그리고 서철(徐喆) 등을 지휘하여 궁궐을 재건했다. 그 궁궐이 바로 오늘날 서울에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이다.

 

그는 이처럼 나라에 큰일을 한 분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큰 인물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성지대사도 그 중의 한 분이었다. 성지대사는 인조반정 때 서인들에 의해 참수를 당했다.

 

이처럼 유명한 풍수인 성지대사가 점혈한 곳에 바로 대구 근교 청도 김씨 중시조가 모셔져 있다. 이번에 이곳을 답사했다. 청도 김씨 시조는 경북 청도읍 상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중시조의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군 청천면에 소재하고 있다.

 

▲ 청도 김씨 중시조 묘 전경

 

성지대사가 점혈한 이곳은 명혈지로 알려져 있고, 혈의 사상(四象)중에서 전형적인 와혈에 해당하는 곳이다. 혈의 형태를 와·겸·유·돌의 사상으로 분류한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가 있어 상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혈의 사상에서 와혈은 일명 ‘소쿠리터’ 또는 ‘소쿠리 명당‘이라 부르고 있으며, 마치 제비집과 같은 형태에 혈이 결작되는 것을 말한다.

 

▲ 입수처에서 바라본 청도 김씨 중시죠 묘의 혈장 주변 청백과 파구, 물의 환포. 즉 조산과 안산의 전경

 

와혈 중 변격에 해당하는 좌변와

 

바로 청도 김씨 중시조 묘는 혈의 사상 중에 와혈(窩穴)에 해당하는 곳이다. 와혈형 중에서도 특히 좌변와(左邊窩)에 해당하는 곳이다. 참고로 와혈 중 변격에 해당하는 좌변와와 우변와에 대한 형태를 그림으로 표시했다. <그림 1, 2 참조>


 

혈장을 답사하기 위해 아침 일찍 회원 두 분과 함께 목적지의 초입처 부근에 도착하여 먼저 원경을 살펴본 후 차량을 이용하여 초입처까지 진입했다.

 

항상 그러하듯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천신(天神)과 산신(山神)께 오늘도 명혈지를 찾아볼 수 있는 기운을 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리고 출발했다.

 

명혈지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다 보니 초입 길을 찾지 못해 산을 헤치며 한참을 걸어 어느 봉우리에 올라서서 한숨을 돌리며 주변 산세를 관망하는 도중 좀 멀리 보이기는 하지만 첫눈에 대혈지로 짐작되는 혈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명혈지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은 마음이었다. 또한 자연의 원리 및 이치에 따른 풍수지리 학문에 대한 옛 선사들의 현장 적용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소 동요되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여 현장에 도착하니 오늘 답사하고자 했던 성지대사가 점혈한 곳임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대명당(穴地)으로 보였다.

 

혈장에 대한 상세한 관찰을 뒤로 하고 먼저 내룡을 살펴보기 위해 입수룡을 따라서 올라가면서 산세에 대해 회원에게 설명했다. 한참을 올랐을 때 어느덧 몸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주산에 해당하는 봉우리에 올라 땀을 식히며 주변을 관망하니 그야말로 과협, 질단(跌斷), 기복, 성봉(成峰)으로 삼천분대가 펼쳐져 있는 것 같고, 만마가 달리는 듯한 형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자연의 오묘함에 다시 한번 감탄과 겸허한 마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혈장으로 들어오는 용에 대해 살펴보니, 멀리 팔공산(1192.9m)에서 동남향으로 머리를 돌려 질단과 과협(過峽), 기복(起伏), 성봉을 거듭하며 인봉과 관봉을 거쳐 갓바위에서 낙맥하여 능성고개에서 크게 과협을 거쳐 힘차게 762.1m의 봉우리를 만든다. 여기서 개장하여 하나는 동쪽으로 행룡하여 무학산(574.5m)을 기봉하고, 또 하나는 남쪽으로 행룡하다가 솟은 봉우리가 환성산(811.3m)이다.

 

계속 남하하면서 설령에서 큰 과협을 거친 후 머리를 동남으로 방향을 바꿔 기복을 거치면서 행룡하다가 다시 개장하여 한 방향은 고려 태조 왕건과 인연이 많은 초래봉(635.7m)을 기봉하고, 한 방향은 계속 동남으로 달려 428m의 주산을 기봉한다. 나경을 이용하여 방위를 측정하니 해임(亥壬)으로 기봉(起峰)했다. 한숨을 돌린 용은 여기서 다시 개장하여 혈장의 외백호를 형성하고, 다른 한 용은 혈장의 외청룡을 형성하게 된다. 본룡은 술건(戌乾)에서 해임으로 3봉을 거치며 행룡하다가 자계(子癸)로 낙맥(落脈)하여 다시 힘 있는 용세로 기봉한다. 여기서 개장하여 좌우 청룡과 백호가 만들어져 혈장을 포근히 감싸주게 되고, 해임으로 천심하여 크게 낙맥한 자리에 전형적인 와혈 중에서 특히 좌측현릉이 혈장을 감싸주는 좌변와의 혈처를 결작한 곳에 청도 김씨 중시조의 묘역이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조성되어 있다.

 

현릉은 심장·가슴 보호하는 왼쪽 팔과 같아

 

사격을 살펴보면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적당한 거리와 높이로 각종 살로부터 혈장을 보호하고 있다. 또한 금성형의 원봉(圓峰)으로 되어 있어 후손들에게 부를 안겨다 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특히 청룡과 백호의 형체가 비슷할 뿐만 아니라 높이와 거리도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산중이지만 장풍(藏風)이 잘 갖추어진 곳이다.


▲ 혈장 뒤에서 바라본 파구와 백호.

 

안산은 중중첩첩하며 혈장을 조응하고 있지만 대도시와 인접해 있다 보니 이미 낮은 산은 개발이 되어 밭으로 변해 있어 다소 멀어 보인다. 공교롭게도 일기가 좋지 못해 사진으로는 잘 나타나지 않음이 안타깝다.

 

풍수지리에서 길지는 산진수회하고 환포장풍된 곳이라고 강조했다. 이곳을 두고 하는 말 같다. 역시 도안(道眼)이상의 눈을 가지신 분이 점혈한 곳이라 아니할 수 없을 정도로 풍수지리 이론에 합당한 자리이다.

 

▲ 와혈 중 왼쪽 팔이 혈장을 감싸고 있는 좌변와인 현릉과 백호 전경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멀리서부터 질단, 과협, 기복, 개장, 위이 등으로 만군을 거느리고 호위를 받으며 내용해 오다가 멈춘 곳이다. 명당수는 지현굴곡으로 흐르다가 청룡 백호가의교쇄로 한문(햵旱 門)했으며, 외명당에는 금호강이 좌수우도(左水右到)로 혈장을 둥글게 환포하여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이번 답사지에 해당하는 문중에서는 선조가 이처럼 좋은 길지에 모셔져 있으므로, 지금까지 가문의 번영이 이어져 왔다는 사실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며, 또한 잘 보존해야 된다는 것도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답사를 통해 현장에서 풍수지리학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한 혈장 내에 여러 조상님을 모시다 보니 혈장에서 보존되어야 하는 혈증들을 많이 훼손시켰다. 특히 와혈에서는 현릉을 손상시켜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초(莎草) 내지는 묘역 조성을 하는 과정에서 현릉에 해당하는 곳의 흙을 파헤쳐 사용한 점은 너무나 안타까운 현장의 모습이었다. 이곳은 사람에 비유하자면 왼쪽 팔이 심장이나 가슴의 중요 부분을 감싸 안으면서 품어 보호하는 형국인데, 그 왼쪽 팔뚝을 손상시켰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혈장 내기(內氣)의 누설(漏泄)은 물론 외부의 각종 살로부터 보호를 하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 처음 성지대사가 점혈하여 작묘할 때는 절대로 현릉을 이렇게 손상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현릉사에서 바라본 혈장과 입수

 

어느 문중이든 윗대 조상님의 묘소에 의해 후손들의 길흉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 대해 여러 차례 설명을 드린 바 있다. 가문이 번창하고 훌륭한 인물이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조상님의 유골이 생기응집처에 놓여져, 오랫동안 보존되어 동기감응에 의한 영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후손들이 무지(無知)로 인해 천기(天氣)에 의해 형성된 혈장을 파손시킨다면 그 가문의 흉화는 물론 나아가 국가적으로도 손실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꼭 명심하여 묘역을 보기 좋게 꾸민다는 이유로 혈장에 손실을 가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만약 사초나 묘역 조성을 위해 흙을 사용해야 할 경우가 있더라도 손상해서는 안 되는 곳이 있으니 신중하기 바란다.


/ 윤태중 풍수지리학 박사 ytj122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