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이 있으면 부인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세조실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청성군 한종손(韓終孫)이 졸(卒)했다"
한종손은 내금위로 있다가 무과시험에 합격하여 중위장(中衛將)이 되었다.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에 중외도통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세조가 동쪽교외에서 대궐의 경비상황을 돌아 볼 때 영문을 지키던 군사들 누구도 감히 제지를 못하였는데 한종손의 군사들만은 그렇지 않고 세조의 출입을 막으며   함부로 허락하지 않았다.
세조가 그 까닭을 물으니 한 문지기가 중위장의 허락이 없으면 절대로 누구든 들여보내지 않는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세조는 한종손을 불러 술잔을 내리며 근무태도를 칭찬하였다.
후일 한종손은 세조를 도와 공신이 되어 청성군 봉호를 받았다.
한종손은 여자를 좋아하고 술을 마시면 기고만장하였다.
그러다 갑자기 죽었다.
세조는 염을 하지 말고 시신을 그대로 두라하였다.
이는 세조가 한종손을 아끼는 마음에 혹시 그가 다시 소생할까 바라는 심정에서였다."
이처럼 세조는 한종손을 끔찍이 아꼈다.
비록 그가 과하게 여색을 즐긴다는 결점은 있었지만 그래도 재물을 탐하거나 큰   비리는 없었기에 세조의 총애는 여전했다.
한종손의 집안은 출중한 무신들을 많이 배출하여 대대로 이름이 높았다.
아버지인 한서룡(韓瑞龍)도 도절제사와 동지중추원사를 지냈다.
한종손은 그의 다섯 아들 중에 셋째였다.
첫째 아들 한장손은 32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한성부판관을 거쳐 삼척부사를 역임했는데 가는 곳 마다 고을을 잘 다스려 임금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리고 '장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집안의 기둥으로써 가족들을 편안하고 화목하게 잘 이끌었다.
둘째 한중손은 2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홍주목사와 충청도 절제사를 지냈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무예가 뛰어났으며 효심이 깊어 주변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넷째 한천손도 무과에 급제하여 의주목사를 역임했다.
그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다섯째 한만손 역시 무과에 급제하여 성종 때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고상하고 깨끗하여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다.
이처럼 자식들 모두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갔으니 이는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조선시대에는 남편의 품계에 따라 부인에게도 상응한 관작을 주었다.
아버지 한서룡이 종2품의 벼슬을 하고 있어서 어머니인 청도 김씨도 정부인貞夫人의 칭호가 있었다.
이는 남편의 품계에 따라 받게 되는 당연한 관작이었다.
그런데 청도 김씨는 보기 드물게 임금으로부터 정녕택주(貞寧宅主)라는 작호를 따로 하사받았다.
이는 남편을 도와 다섯 아들을 전원 무과에 급제시켜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공을 인정받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임금이 매년 특별한 상급을 내려 격려하며 공을 널리 알렸으니 오늘날로 보면 훈장을 받은 것과 진배없다.
조선시대, 여인에게 이렇게 따로 작호와 상급을 내린 일은 매우 드물다.
요즘 대통령 부부가 퇴임하면서 무궁화대훈장을 받는 것을 놓고 말들이 많다.
정치권에서 지난 대통령에 대해 "물러나는 대통령이 훈장을 받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부인까지 무궁화대훈장을 받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비난했던 일이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을 잘했다면 대통령뿐 아니라 부인에게 상을 준들 무슨 흠이 되겠는가.   

글쓴날 : [13-02-18 17:52] 호남신문기자[ihonam@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