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글은 아래 출처에서 밝힌 바와 같이 청도신문에 실린 박윤제님의 칼럼입니다.
박윤제님은  각북면 우산리 출신으로, 현재 청도문화원 원장이시며 화양읍 서상리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출처: 청도신문 http://www.chdnews.com/default/index.php 칼럼 [박윤제의 이야기 향토사]

고려시대 청도군(淸道郡)의 부침(浮沈)

2019년 08월 22일(목) 15:18 [인터넷청도신문] 

역사의 중요성은 보통사람에게는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지금까지 청도는 일관되게 정리된 역사서가 없었다. 군지(郡誌)나 읍지(邑誌)등에서 보면 정리된 것 같기는 하지만 2개 이상을 갔다놓고 보면 하나같은 것이 없다 하나같지 않다는 것은 틀리다는 말을 할 수 가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도 틀렸는지 아는 사람도 없거니와 틀린 것을 아는 사람 또한 별로 없는 것 같다. 모두 많은 역사서를 접한 것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청도 관련된 옛 지도를 입수한 것이 50여개 이다. 그중에 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지도를 그렸던 시대가 다르고 그린 사람이 달라서 그랬기도 하겠지만 정해진 시기와 관할(管轄)의 변경으로 달라진 때문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번 호에는 국사편찬위원회 편사국장을 지낸 박홍갑선생이 정리한 고려시대 청도가 군(郡)에서 현(縣)으로 다시 군(郡)으로 부침한 것에, 대한 정리한 것을 미리 소개해 보려고 한다.

1. 원종 12년(1271), 현에서 군으로 승격 고려 무인 집권기에 침입한 몽고에 대항하던 고려 정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을 하고 말았는데, 이에 반기를 든 삼별초들이 끝까지 항전을 할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대몽강화(對蒙講和)가 이루어진 뒤인 원종 11년(1270) 5월 강화도에서 반기를 들었다가 9월부터 근거지를 진도로 옮기면서 항쟁을 이어갔다. 삼별초 지도부는 남해 연안에 세력권을 확보하기 위해 마산·김해·동래·남해·창원·거제 등의 장악을 시도했고, 이때 밀양 지역 토호들 중심으로 삼별초에 호응하는 세력들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방보·박경순을 비롯한 밀양 토호들은 부사를 살해한 다음 봉기 사실을 여러 군현에 알리고, 김해와 청도를 장악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이에 대한 『고려사』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밀성군 사람 방보(方甫)와 계년(桂年), 박평(朴平), 박공(朴公), 박경순(朴慶純), 경기(慶祺) 등이 밀성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장차 진도(珍島)에 호응하려고, 부사(副使) 이이(李頤)를 죽이고 드디어 공국병마사(攻國兵馬使)라 칭하면서 여러 군현(郡縣)에 공문을 보냈다. 그리고 그 도당을 보내 청도감무(淸道監務) 임종(林宗)을 죽이자, 청도군 사람들이 거짓으로 항복하고 술을 마시게 하여서 취하게 한 다음 섬멸하였다. 그 때 밀성군 사람 조천(趙阡)이 일선(선산) 현령이었는데, 적(敵)이 조천을 불러서 함께 반란하기로 약속하자고 하니 조천이 이에 따랐다. 얼마 있다가 그 도당이 청도에서 섬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밀성 사람 손일(孫逸)과 함께 적의 우두머리를 살해하기로 모의하였는데, 안찰사(按察使) 이오(李敖)가 금주방어사(金州防禦使) 김훤(金晅), 경주판관(慶州判官) 엄수안(嚴守安)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갑자기 도착하자, 조천 등이 방보 등을 죽이고 항복하여 적이 마침내 평정되었다.
삼별초와 내응한 밀양 세력들이 청도로 들이닥쳐 청도 감무였던 임종의 머리를 베어 장대에 매달은 후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흥에 겨워 잔치를 벌였다. 『고려사』 기록에서는 청도 토착세력들이 일단 거짓으로 항복 한 뒤에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 적을 섬멸했다고 전할 뿐,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에 대한 언급은 없다. 적들에게 술을 먹여 그 틈을 노린 이가 바로 청도 호장(戶長 : 향리의 우두머리) 백계영(白桂英)이었는데, 이런 사실을 기록한 것은 조선후기에 들어와 편찬된 『연조귀감』이었다. 이는 조선 정조 때 이진흥(李震興)이란 사람이 향리(鄕吏)들의 사적(事蹟)을 집약 정리한 책인데, 향리는 그 지역에 대대로 정착해 온 토착세력을 말한다. 당시 청도 향리 백계영이 적들에게 잔뜩 취하게 한 다음, 급제하여 개경에서 살고 있었던 동생 백이장(白利章)에게 연락하여, “너는 왕인(王人 : 왕을 모시는 사람)이고, 나는 수리(首吏 : 고을 아전)에 불과하지만, 적들이 쳐들어 왔으니, 어찌 천지간에 앉아서만 당하겠는가? ”하고는 형제가 힘을 합쳐 향인(鄕人)들을 격려하여 일거에 적을 섬멸하니, 안렴사가 이 사실을 널리 알려 품관(品官)이 되었고, 청도가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었는데, 백계영이 원하는 바를 조정에서 들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청도가 현에서 군으로 승격된 바가 있지만, 이후 편찬된 각종 지리지에서는 전혀 언급하질 않고 있다.


2019년 09월 10일(화) 11:39 [인터넷청도신문] 

당시 삼별초와 내응했던 밀양은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되어 경주에 예속되고 말았다. 이 조치가 이루어진 시기는 삼별초 항쟁이 마무리된 지 4년이 지났을 무렵인 충렬왕 원년(1275)이었는데, 이처럼 늦어진 것은 밀양 출신 인물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에 비추어 보면, 삼별초의 항쟁이 진압되고 난 뒤 그 활약한 정도에 따라 고을 읍격을 조정했을 것은 자명한 이치이고, 청도가 감무를 파견하던 현에서 지군사를 파견하는 군으로 승격시킨 것은 백계영이 공을 세운 바로 그 해에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후 청도가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는데 그 시기 역시 알려진 게 없다.

2) 고려 말 청도 읍격(邑格)의 승강(昇降)
몽고의 침입과 그 지배 아래에서 청도군의 읍격은 매우 심하게 오르내렸다. 이는 청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으로 빚어진 일이었는데, 그 승격의 이유는 대부분 환자(宦者 : 벼슬로 나간 자)나 군공(軍功) 등과 같은 이유로, 혹은 고승(高僧)의 고향이거나 어태지(御胎地)란 이유로 이루어졌다. 청도 역시 그런 경우 중에 하나였는데, 다음 자료에서 이런 사실들이 잘 나타난다.
보탑실리왕[忠惠王] 대 지정(至正) 계미년(1343년) 고을사람 상호군 김선장(金善莊)이 조정에 활약하여 나라에 보좌한 공이 있음으로 지군사(知郡事 =郡)로 승격시켰다. 충목왕 지정 갑신년(至正甲申 : 1344)에 다시 감무(監務)로 격하하였다. 공민왕 15년 지정 병오년(至正丙午 : 1366년)에 고을 사람 감찰대부 김한귀(金漢貴)가 김선장(金善莊)과 함께 까닭 없이 군(郡)의 격(格)이 강등 된 이유를 갖추어 임금에게 상주하여 다시 승격하여 지군사가 되었다.
조선에서 그대로 따랐다.


2019년 09월 24일(화) 15:30 [인터넷청도신문] 

충혜왕 때 청도 출신이었던 김선장이 공을 세워 지군사로 승격되었다는 것이다. 지군사는 후일 군수에 해당하는 지방관이었는데, 종전에 감무를 파견하던 곳에서 지군사를 파견하는 곳으로 되었으니, 승격되었다는 의미는 확실하다. 『고려사』백관지 외직조에 의거해 보면, 고려시대에 주(州)나 군(郡)에는 5품의 지사(知事)를 파견했으니, 지주사 혹은 지군사라 칭하였다.
그렇다면 충혜왕 때 김선장은 어떤 공을 세웠을까?
고려 28대 임금인 충혜왕은 충숙왕의 아들로 31대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의 친형이다. 그는 1328년 2월 세자 신분으로 원나라 볼모가 되어 숙위(宿衛)하며 머물렀다. 25대 충렬왕과 26대 충선왕이 원나라에 의해 왕위를 수시로 빼앗겼던 것처럼, 그의 아버지 충숙왕도 1330년 원나라에 의해 사실상 왕위를 빼앗겼다. 충혜왕은 그렇게 왕이 되었다.
2년간의 짧은 1차 재위 기간에도 정치 상황은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충혜왕은 세자 시절 원나라 승상 엘테무르(燕帖木兒)와 가까이 지냈다. 그리고 세조 쿠빌라이의 고손녀인 이렌첸반(亦憐眞班, 덕령공주)과 결혼했다. 그런데 충혜왕을 지지해 준 엘테무르가 사망하자, 고려 출신 원나라 환관이던 백안(伯顔)의 참소로 폐위되었다. 정치에는 관심 없고 방탕하다는 이유였다. 왕위에서 쫓겨난 충혜왕은 원나라로 소환되었고, 아버지 충숙왕이 복위하였다.

1339년 충숙왕이 죽자, 조적(曺頔) 등이 음모를 꾸며 심양왕 왕고(瀋陽王 王暠)를 옹립하려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충혜왕은 직접 말을 타고 나와 화살을 쏘며 반격했다. 수적으로 우세한 충혜왕의 군사들이 활을 쏘아 조적을 죽이면서 반란을 평정할 수 있었다. 충혜왕은 원나라 측에 왕위 계승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충혜왕은 원나라로 압송되어 형부(刑部)에 투옥되었고, 상당수 고려 관리도 함께 압송되었다. 그런 와중에 충혜왕을 견제하던 환관 백안이 권력을 잃는 등 원나라 정계 개편으로 혼란에 빠졌다. 이를 틈 타 충혜왕은 복위되어 6개월 만인 1340년 5월 고려로 귀국하였다.

충혜왕이 재집권하여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자, 조적의 난을 평정할 때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공신 작호를 주어 포상의 은전을 내렸다. 김선장은 대호군(大護軍) 신분으로 반란군 평정에 앞 장 선 결과 1등 공신이 되었다. 당시 1등 공신에게 내린 포상을 보면, 공신각에 초상을 걸게 하였음은 물론 그들의 부모와 처는 3등을 뛰어넘어 작위를 주고, 아들 1명에게 7품직을 줄 것이며,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 사위에게 대신 8품직을 주고, 아울러 토지 100결과 노비 10구를 지급하는 것이었다. 이때가 충혜왕 후3년, 즉 1342년 6월이었다.
하지만, 당시 고려 국내 정세는 정치 세력 간의 알력이 심했는데, 충혜왕을 견제하던 원나라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奇轍)을 중심으로 한 친원파가 핵심이었다. 이들의 음모에 의해 충혜왕은 1343년 11월 원나라 환관이자 사신으로 왔던 고용보 등에게 구타당한 후 원나라로 끌려가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응양군(鷹揚軍) 김선장은 창에 찔리는 큰 부상을, 당했고, 그도 결국 충혜왕과 함께 원나라에 압송되는 처지가 되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충혜왕 입장에서 김선장은 매우 충성스런 신하였다. 그의 공로를 생각해서 감무를 파견하던 청도를 지군사로 승격해 주었고, 이런 사실에 입각하여, 『고려사』 지리지에서 “충혜왕 후4년 청도군 출신 상호군 김선장의 공으로 지군사로 승격했다(忠惠王後四年, 以郡人上護軍金善莊有功, 陞知郡事).”라고 서술했던 것이다. 이를 좀 더 압축해 보면, 김선장이 1등 공신에 올랐던 것이 충혜왕 후3년(1342) 6월이었고, 충혜왕이 원나라로 끌려간 것이 이듬해 11월이었으니, 충혜왕 후4년(1343) 상반기 즈음에 청도가 승격되었음이, 분명하다


2019년 10월 10일(목) 14:36 [인터넷청도신문] 

그리고 8살에 불과한 충혜왕의 아들 충목왕이 즉위했는데, 김선장은 이미 원나라에 압송되고 없었다. 이 시기에 청도가 감무 파견지로 환원되고 말았다. 충혜왕 반대세력들이 집권하던 때였으니,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충혜왕이 원나라에 끌려가 폐위되고, 그의 아들 충목왕이 즉위하자마자 청도는 지군사에서 감무 파견 지역으로 강등되었다. 불과 1년도 채 안되어 일어난 일이었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역학 관계 때문이었는데, 원나라에서 파견되어 왔던 환관 고영보와 기황후의 동생 기철이 정권을 농단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다가 충목왕도 일찍 죽고 그의 동생 충정왕이 즉위했지만, 그 역시 재위 기간 역시 길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즉위하게 된 공민왕은 친원파를 제거하는 등 개혁정치를 부르짖고 있었다. 하지만, 이 당시 잦은 외적들의 침입으로 내우외환을 겪고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청도 출신 김한귀가 조정의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공민왕 8년 1차 홍건적 침입에 이어 2차에는 대규모 침입이었다. 공민왕이 안동까지 피난 가는 비운을 겪은 것도 이때이다. 고려군의 대대적인 공세로 나갔다. 공민왕 10년(1361) 개경을 수복할 때 김한귀는 정세운과 함께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공민왕 11년(1362) 홍건적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해 여러 실력자들을 지방으로 파견할 때 동경도병마사(東京道兵馬使)로 임무를 부여받았고, 개경을 수복할 당시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공신을 책봉할 때 이성계 등과 함께 1등 공신에 올랐다. 그리하여 그는 후일 감찰대부(監察大夫), 개성윤(開城尹), 밀직부사(密直副使), 전라도(全羅道) 도순문사(都巡問使) 등을 역임했는데, 그가 감찰대부로 재직할 당시 까닭 없이 감무로 강등된 청도 읍격을 다시 환원시켜 지군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그것이 공민왕 15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관례는 조선에까지 이어졌다. 특히 조선 초기 태종조부터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으로 지방행정 제도를 개편하고 있었는데, 각 군과 현 단위를 재조정하는 작업이었다. 이미 공민왕 때 군 단위로 승격되어 지군사를 파견하던 청도는 조선에서도 그대로 이어가 군수(郡守)를 파견하는 곳으로 정착되었다.
이처럼 고려 말에 청도 읍격이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청도 출신의 김선장과 김한귀 때문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청도 김씨 출신이다. 고려시대에 청도에 토착하고 있던 토성(土姓)은 5개 성씨였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던 것이 청도 김씨였다. 청도 김씨의 시조로 알려진 영헌공 김지대가 출사(出仕)한 이래 그 후손들 또한 중앙의 고급 관료로 재직하면서 청도를 알리는 데 큰 공을 세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