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문화순례](35)횡성 조충장군 지석

[강원일보 2006-09-26 00:03]

  횡성군 횡성읍 정암리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된 조충장군의 묘(墓)와 지석(誌石)이 있다. 지석이란 망자의 이름, 생몰일, 행적, 무덤의 방향 등을 적어 무덤 앞에 묻는 판석(板石)으로 강원도 문화재 474점 중에 지석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유일한 것이다.

   조충장군은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서 시중을 지낸 당대의 실역자인 조영인의 아들로 1171년에 개경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횡성이다. 부친의 후광을 입어 음직(蔭職)으로 관리가 되었으나 학문에 정진하여 대과에 급제하였고, 타고난 체질과 뛰어난 재능, 탁월한 지휘능력으로 국자제주, 대사성, 한림학사, 지공거, 동북면병마사, 예부시랑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성장하였다. 이후 서북면병마사, 동북면병마사, 상장군을 겸임하면서 여진족과 거란족의 침입 등을 물리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정당문학판예부사, 수태위동중서문화시랑평장사수국사 등의 요직을 역임하다가 1220년 별세하였다. 국가에서는 3일간 조회를 철하고, 성대한 장례를 행하였으며, 개부의동삼사문하시중을 추증하였다.

 조충장군의 묘는 원래 개성군 상동면 연동에 있었으나 1945년 해방 후에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북이 분단되자 횡성조씨 문중에서 1948년 현재의 묘역으로 이장하면서 지석도 함께 매장하였다. 1988년 10월 묘역을 정비하면서 지석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지석은 청석(靑石)으로 가로 80cm, 세로 55cm, 두께4cm로 되었으며, 뒷면은 거칠게 다듬었고, 앞면은 잘 다듬어 글씨를 새겼다. 둘레에는 정교한 당초(唐草)무늬를 새기고 그 안쪽으로 테두리선을 그었다. 세로로 금을 그어 글씨를 새기고 붉은 칠을 하였는데, 글씨의 크기는 약1cm이며, 한 줄에 41자를 새겼고, 전체는 50행이다. 지석은 네 조각으로 깨져있는 상태이므로 일부는 판독이 어렵다.

 조충장군은 당대에만 부귀영화를 누렸던 것이 아니라 부친인 조영인(趙永仁)도 타고난 천품이 총명하고, 박학다식한데다 덕망을 갖추고 있어 수많은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204년에 문하시중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고, 사후에는 신종(神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조충장군의 아들 계순(季珣)도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 관직이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집권자인 최항(崔沆)에게 딸을 출가시켜 당대의 제일의 권세가가 되었다. 조충장군은 아버지와 아들 3대에 걸쳐 고려 중기의 명문거족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고, 현재 횡성의 세덕사(世德祠)에 배향되었다.

 횡성은 강원도에서도 가장 작은 고을의 하나로 신라시대에는 삭주(朔州)의 영현(領縣)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원주의 속현(屬縣)이었고, 조선태종13(1413)년에 현감(縣監)을 두어 독립된 현이 되었는데, 강원도 26개 군현 중에서 종6품관인 현감이 관할하는 가장 작은 고을의 하나였다. 이 작은 고을을 본관으로 한 성씨가 3대에 걸쳐 정승판서(政丞判書)를 배출한 명문거족으로 당대의 최고 실력자가 된 성씨는 횡성조씨 외에는 우리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원영환<강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