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성촌] 대구 동구 반야월  청도 김씨
500년 호국보은 충절이 한눈에
 
   
 
   
   
 

대구 동구 반야월에서 하양 방면으로 시원스레 달리다가 청천역을 지나 남하 다리에서 좌회전해 들어가면 500여년 역사를 간직한 청도 김씨(淸道 金氏) 집성촌이 나온다.

마을 초입 국도변에 자리 잡은 금포공 사당은 호국보은의 절개와 기상이 한눈에 느껴진다. 이 사당은 경상`전라`충청 3도 수군을 통제하는 삼도통제사를 지낸 금포공 김시성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으며, 금포공의 고조부때부터 터를 잡아 살아온 유서깊은 마을임을 일깨워준다.

마을 어귀로 들어서자 정자와 고풍스런 연자방아가 눈길을 끈다. 마을 뒤로 수려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아늑한 느낌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청도 김씨 가문은 충효를 바탕으로 실학적 선각자의 꽃을 피운 대동여지도의 고산자 김정호 선생으로 유명하다.

농사일로 바쁜 와중에도 청도 김씨 36세손인 김중재(51) 이장은 “현재 200여가구가 깻잎 특작을 하며 찬란한 선조의 얼을 잇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 남하1리의 청도 김씨 집성촌은 단일 자연부락에서 4개의 재실(하락재`곡간재`금포당`삼괴정)을 둔 곳으로 청도 김씨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특히 종택 뒤편에 모셔져 있는 금포공의 불천위(不遷位) 사당은 영남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귀한 문화유산이다. 불천위 사당은 불천지위의 뜻.‘옮기지 않는 신위’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영면하면 그 신위를 사당에 영구히 모셔도 좋다고 나라에서 허락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제사는 주자가례에 의해 고조까지 4대 봉사를 하게 돼 있고 그 윗대 조상은 시제때에 모시나 국가에서 불천지위, 불천위를 봉하면 그 분의 제사는 영구히 지낼 수 있게 된다. 35세손인 김철언(70)씨는 청도 김씨의 시조 영헌공 김지대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대군의 8세손이라고 밝혔다. 시조 김지대는 고려 고종과 명종대의 명신으로 1217년(고종 4년) 변방에 거란족이 침입하자 방패 머리 순두시에‘충효 쌍수(忠孝雙修)라는 시를 남기고 아버지를 대신해 전장에 나가 큰 공을 세웠다. 이듬해 문과에 급제해 전주 사록을 거쳐 보문각 교감에 제수돼 전라도 안찰사를 거쳐 비서소감, 지공거, 추밀원 부사를 거쳐 첨서추밀원사에 승진했다. 1258년(고종 45년) 북방에 침입한 몽골군을 물리치고 민신을 추슬러 서북 40여성을 안정시킨 공으로 청도의 옛 지명인 오산군으로 봉해졌다. 이후 원종이 즉위하자 정당문학과 이부상서를 거쳐 금자광록대부로 중서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청도 김씨의 본관은 종중에서 본관을 만든 것이 아니라 나라에서 시조공에게 군호를 하사해 만든 것이다. 이러한 본관의 유래는 흔치않아 명문가의 문중으로 알려져 있다.

시조 영헌공 김지대는 1266년(고려 원종7년) 향년 77세로 타계했다는 기록과 함께 앉아서 죽음을 맞이한 좌서(坐逝)로 유명하다. 좌서는 덕망과 수양이 높은 고승들이 앉아서 꼿꼿이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기 드문 일이다. 시조 영헌공은 정인지의 고려사, 김종서의 고려사절요, 서거정의 동국통감 등에 청렴결백한 청백리로 정사를 수행했던 재상으로 기술하고 있다. 또한 김지대는 고려조 10대 시인으로 꼽히는 한편 조선 성종 때 대학자인 서거정이 저술한 동문선에도 김지대의 시가 여러 편 실려 있을 정도로 문학사적으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특히 청도 김씨의 자랑 중 하나는 조선후기 지리학자 겸 실학자인 고산자 김정호. 김정호는 지도 제작과 지지 편찬에 투혼을 바친 선각자로서의 아름다운 모습을 후세에 남겼다. 김정호는 1834년에 지구도를 판각한 청구도 상하 2책을 만들었다. 1861년(철종 12년)에는 혼자의 힘으로 대동여지도 22첩을 판각해 간행하는 저력을 펼치기도 했다. 청구도는 필사본이고, 대동여지도는 목판본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약 16만2천분의 1 축척으로 남북을 22단(1단은 120리)으로 나누고, 다시 각 단을 6치6푼의 폭(1폭은 80리)으로 횡절하도록 해 이합이 자유로운 절첩식 지도로서 10리마다 눈금을 찍어 거리 측정이 용이하도록 해 당시로서는 가장 정확한 지도이다. 지도는 산과 산맥, 하천의 이름과 형상, 그리고 관청`병영`성터`역참`목장`봉수`능묘`도로 등을 상세히 담았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 제작을 위해 30여년간 전국 각지를 두루 답사하면서 실측하고 백두산을 17여회나 올랐다고 전해진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불굴의 투혼과 경세치민을 위한 실사구시의 정신은 청도 김씨 후손들의 가슴 한편에 뿌듯한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또한 이 마을에는 수령 200년의 팽나무(경산 노거수 23호)가 있고, 의병장 신해(申海) 선생을 모신 정자가 마을 사람들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신해 선생은 신숭겸 장군의 후손이자 금포공 김시성의 외조부로 임란 때 의병장이 돼 영천성을 공략했으며 전쟁 후 안동 부사가 되어 선정을 폈다고 전해진다.

전수영기자 poi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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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07월 2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