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당 청도김공 경모비
溫知堂 淸道金公 景慕碑


<碑 文>

古之學者崇本而己務實而己
至于後世剛不然外革爲尙而實
德爲輕末日益富而本日益亡是
果可以爲士乎嗚呼如溫知堂金
公者可謂古之士而非今之士歟公諱基洙字致圭其先淸道人其爲人慤謹
敦厚有長者儀度嘗服習家庭能自刻苦沈潛于四書五經之旨參考于東孺
諸賢之說而其所講習不離乎存心養性之方而尤嚴于義利取舍之分其見
之于行也孝悌修于家而仁愛及於物宗族化其風而鄕里服其義然嘗以家
貧 老未得就正于奇蘆沙先生爲悔而與蘆門高足鄭老栢軒鄭日新鄭月
坡奇於沙詣賢爲道義交躬而書而問之難之粥粥若來能而知益博○○若
不及而行益修其不○於外也未也而必歸之眞實者固有異平世俗之學矣
東亂之作毅然不懼嚴戒不姓及坊人勿或犯之剃令之下守死不從曰今日
春秋存于頭上一寸及遭社屋憂憤成疾杜門自靖不興人往來但有執經來
者諄諄敎之未嘗有倦色因而成就者多平生不喜著述且或有之幸乎覆釜
且厄于灰燼其所收拾而印之者爲略干卷甚寥寥矣然貴不在多也公歿之
六十八年其門族議于綾之士林治一石紀其蹟其孫正熙與典校李泳福來
徵文于不○撮其槪而爲之銘曰
學不待于淵源兮極難苦其進的得諸賢以爲友兮被麗澤之資益析絲毫之
細微兮力所久而眞積不○○於口耳兮躬其行而必得臨大亂而不懼兮肝
腸堅乎鐵石憤無國而杜門兮樂顔氏之所樂皓首坐乎皐比兮勸遠近之來
學君子道固如是兮有何嫌于窮厄未得附于靑雲兮可無沒其懿蹟鄕論起
于千秋兮求余辭而深刻
檀君紀元四千三百十六年癸亥秋分節
坡平 尹 丁 ○ 撰


<번역문>

옛 학자(學者)는 근본을 숭상하고 실질적인 것을 힘썼는데 후세에 와서는 그러하지 않고 외화(外華)를 숭상하고 실질적인 것을 가벼히하여 겉치레만 좋아하고 근본을 소홀이 하니 이 과연 가이써 선비라고 할 수 있으리요.
아! 온지당(溫知堂) 김공(金公)같은 이는 가이 옛 선비라할 수 있고 이제 선비가 아니다. 공(公)의 휘(諱)는 기수(基洙)요 자(字)는 치규(致圭)이다. 본관은 청도이다.
그 사람됨이 독실하여 어른다운 데가 있었다. 일찍이 가정에서 글공부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을 힘써 익히고 우리나라 여러학자들의 학설을 참고하여 그 공부함이 마음가짐과 천성 기르는데 떠나지 아니하고 더욱 의리(義利)를 가리는데 엄격하였다.
그 행함에 있어서는 효제(孝悌)를 집에서 닦아 인자하고 사랑함이 먼데까지 미치니 친척들이 많이 감화되고 고을사람들이 감탄하였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노사(蘆沙) 기선생(奇先生)에게 배우지 못함을 후회하여 노사선생 제자인 정노백헌(鄭老栢軒) 정일신(鄭日新) 정월파(鄭月波) 기송사(奇松沙) 여러분과 도의(道義)로 사귀어 몸소 나아가기도 하고 서면으로 어려움을 묻기도 하니 겸손하여 능하지 못한 것 같으나 더욱 많이 알고 부지런하여 미치지 못한 것 같으나 행동을 더욱 닦아 진실하게 힘쓰니 보통 학자들과 달랐다.
1894년 동학란(東學亂)이 일어남에 굳굳하게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질(子姪)과 지역 사람들에게 가담하지 말도록 엄격하게 경계하였다. 상투를 깍으라 어명(御命)이 내리니 절대로 깍지 아니하였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日本)에 합병(合倂)이 됨에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병이나 문밖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다만 책(冊)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으면 자세하게 가르쳐 게을리 아니하고 많은 선비가 배출되었다. 평소에 글짓기를 좋아 아니하고 혹 있더라도 버렸음으로 그 남아 있는 것이 얼마되지 아니하다. 그러나 반듯이 많은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공(公)이 별세(別世)한지 68년 뒤에 그 친척들이 능주사림(綾州士林)들과 의논(議論)하여 비석(碑石)을 세워 그 업적을 기록함에 있어서 그 손자 정희(正熙)가 전교 이영복과 나에게 와서 비문을 청함으로 대개 위와 같이 하고 명(銘)하노니
배우기를 연원(淵源)없이 하였으니 그 애로를 이루 말할 수 없다. 여러 어진 이들과 벗 삼으니 도움이 참으로 많았다. 세밀한데까지 파헤치니 오래오래 힘씀이로세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고 실천으로 옮겼다.
혼란한 때를 당하여 두려워 아니하니 마음이 쇠와 돌처럼 굳건하였다. 나라없음을 분통하여 은거생활 하면서 안자(顔子)의 즐거한 바를 즐거하였고 늙도록 훈장(訓長) 자리에 앉아 원근(遠近) 학자들을 가르쳤다. 군자(君子)의 도(道)는 이러한 것이니 어찌 궁곤(窮困)함을 불평하겠는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 훌륭한 업적 영원하네. 향론(鄕論)이 천주에 이르나 나의 비문 깊히 세기노라.
1983(계해)년 추분절
파평(坡平) 윤 정 복(尹丁○) 글을 짓다
  소재지 화순군 춘양면 석정리
  건립연대 1983년
  규 모 총높이:3.15m 비높이:1.60m 넓이:0.55m 두께:0.21m
출처:http://www.hwasun.go.kr/hwasun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