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閥閱 연구하다 족보 본격 연구 가족사와 지방사가 곧 한국사다 ”
우리 문화의 源流를 지키는 사람들_11. 族譜 - 차장섭 강원대 교수 
2013년 08월 20일 (화) 14:55:39 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t

 

▲ 오천정씨 수질본 족보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개념의 가장 큰 바탕은 바로 혈통이다. 같은 혈통을 가진 관계의 확장을 통해 자손을 이어가고 그 족적과 흔적을 남긴다. 그 족적과 흔적의 기록이 바로 族譜다. 족보의 사전적 풀이는 ‘父系를 중심으로 혈연관계를 도표식으로 나타낸 한 종족의 계보’로 나와 있다. 그러나 이 풀이는 제한적인 설명이다.

우리나라 ‘부계’ 중심의 족보는 조선 후기에 와서 정착된 것이고, 전기는 그렇지 않다는 게 족보에 천착해 연구를 이어가고 있는 차장섭 강원대 교수(한국사)의 설명이다. 조선 초기 족보는 친가. 외가를 함께 포함한 ‘內外譜’ 형태였다는 것이다. 족보 중심의 가족사와 이것이 모여 형성된 지방사가 곧 한국사라고 말하는 차 교수를 만나기 위해 폭염의 대관령을 넘었다.

한 家門의 사회·역사적 의미 담은 기록
차 교수는 족보를 이렇게 설명한다.“족보는 혈통이 같은 동족이 그들의 시조로부터 현재 자손까지의 계보를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라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혈통의 계승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선후 대수와 항렬별로 친소관계를 밝힌 기록이다.” 차 교수에 따르면 족보의 기능은 종적인 것과 횡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종적으로는 始祖에서 현재 동족까지의 世系와의 관계를 나타내 주며, 횡적으로는 현재 동족 상호간의 혈연적 원근관계를 표시해 준다. 족보의 종류는 家乘, 八高祖圖, 大同譜, 派譜 등으로 구분된다.

가승은 家牒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작성한 사람이 자신이 가계를 직계에 한해 기록한 계보를 말한다. 팔고조도는 자신을 기점으로 조상을 찾아올라 가면서 기록한 것이다. 즉 역피라밋 모양으로 자신의 부계와 모계를 역으로 추적해 기록하는 것이다. 팔고조도의 특징은 위에서 언급했듯 부계 중심이 아니고, 부계와 모계를 동등하게 기록하고 있는 점이다. 대동보는 동성동본의 모든 사람을 기록한 족보를 말한다. 그런데 대동보는 후대로 오면서 그 분량이 너무나 방대해 편찬에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대동보를 편찬하는 그 사이에 파끼리 족보를 편찬하게 됐는데, 그 것이 바로 파보다.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인 안동권씨 성화보

 

파보는 同姓同本 가운데 같은 파만을 기록한 족보를 가리킨다. 우리나라 역대 족보를 실증적으로 이렇게 구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분야를 파고들어 공부한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족보와 관련해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 크게 중점을 두지 않은 측면이 크다. 남겨진 각종 형태의 족보가 많은데, 방대한 양에 비해 위서가 많아 사료적 가치가 없다는 점 때문이다. 차 교수는 그러나 이 빈틈을 파고들어 족보를 본격적으로 연구한다. “私家에서 족보를 쓰는데 내부적으로야 어떤 기준이 있었겠지만, 사회적으로는 그런 게 없으니 가문을 띄우기 위한 차원 등에서 위서가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족보는 한 가문의 사회·경제·문화· 역사적 의미를 담은 기록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을 통해 당대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차 교수는 족보에 관한 첫 논문을 안동김씨 족보를 바탕으로 썼다. 이 걸 쓰면서 100권이 넘는 족보와 대동보를 비롯해 종보, 파보까지 다 뒤지면서 족보의 의미를 확인했고, 꺼림칙한 위서와 관련해서는 강릉김씨 족보를 다루면서 어떤 확신을 얻었다. “강릉김씨 집안에서 200년 정도 되는 戶口單子가 나왔다. 이거다 싶었다. 호구단자와 족보를 대조해보니 98% 이상 내용이 같았다. 호구단자는 공적인, 그러니까 국가가 관장하는 공공기록인데, 그렇다면 족보가 신뢰성이 있다고 판단한 거다. 그 전까지 족보는 사료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인식돼 왔는데, 이 논문을 통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차 교수는 해주오씨 족보를 통해 우리나라 전래 족보의 전형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해주오씨 족보에는 우리나라 족보의 초기형태인 族圖, 그러니까 혈통관계를 그림으로 기록한,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부터 내외보, 대동보, 파보까지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족보가 간행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부터 일 것으로 추측된다는 게 차 교수의 설명이다. 중국의 송나라에서 족보의 간행이 유행했는데, 이 영향으로 왕족, 귀족들을 중심으로 족보가 간행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 의종 6년인 1152년에 작성된 金義元의 墓誌에 “옛날에는 족보가 없어서 조상의 이름을 모두 잃었다”고 적고 있는데서 알 수 있다. 족보편찬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왕실족보가 편찬되면서 촉진된다.

 

▲ 조선왕실 족보인 선원록과 편찬 관청인 ‘선원록아문’의 현판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嫡庶의 구분을 명확하게 한다는 명분아래 태종 12년인 1412년 「璿源錄」, 「宗親錄」, 「類附錄」을 작성한 이래로 「국조보첩」, 「당대선원록」, 「열성팔고조도」 등을 宗簿寺에서 편찬해 비치했다. 그리고 敦寧府에서는 외척과 부마를 대상으로 한 「敦寧譜牒」을 편찬했으며, 忠勳府와 忠翊府에서는 각기 역대 공신들의 족보를 작성해 비치했다. 조선 초기의 족보를 보면 친손과 외손의 차별이 없이 모두 수록하고 있으며, 先男後女에 관계없이 연령순위로 기재하고 있다. 또한 간행된 시기와 修譜 간격도 130년에서 200년 정도 됐다.

족보 간행은 고려때부터… 17세기에 일반화
이후 15세기부터 私家에서도 족보가 편찬되기 시작하는데, 현존하는 것으로는 안동권씨 성화보(1476년), 문화류씨 가정보(1562년), 강릉김씨 을축보(1565년)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족보의 간행이 일반화된 것은 17세기부터다.

16세기 이래 민중의 성장에 따른 천민층의 양민화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한 신분질서의 해이로 17세기 후반부터 족보가 쏟아져 나온다. 차 교수는 이와 관련해 “이는 전통적인 양반가문이나 신흥세력을 막론하고 모두 세계와 족계를 정리하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 배경을 지적한다. 이 당기 간행시기와 수보 간격은 50~60년 정도 된다. 초기에 비해 간행시기와 수보 간격이 단축된 것은 동족집단에 대한 인식과 의식이 갈수록 짙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족보 수록 내용도 많이 변한다. 기록범위를 친손에 국한하고 있으며 기록순서도 선남후녀의 순서로 변했다. 족보의 기록형식이 달라지는 것은 당시 사회의식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즉 성리학의 심화와 예학의 발달, 종법적 가족제도의 정착으로 인한 것인데, 예컨대 성리학의 심화로 조상에 대한 제사가 일반화됐을 뿐 아니라 제사 윤번제가 장자에게 고정되는 형식으로 바뀌면서 재산상속도 자녀균분에서 장자우위 상속으로 변하는 등 사회 및 가정의 변화와 함께 족보 기록형식도 달라졌다. 신분상의 구분과 차별도 족보 간행을 부추기는 한 고리로 작용했다.

 

강릉김씨 집안에서 200년 정도 된 호구단자가 나왔다. 이거다 싶었다. 호구단자와 족보를 대조해보니 98%이상 내용이 같았다. 호구단자는 공적인 즉 국가가 관장하는 공공기록인데, 그렇다면 족보가 신뢰성 있다고 판단할 수 있지 않겠는가.

 

“조선 후기에는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해 군역을 져야하기 때문에 상민들은 양반이 되려고 관직을 사기도 하고 호적이나 족보를 위조해 새 양반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라고 차 교수는 설명하고 있다. 족보는 조선 후기를 거쳐 현대로 오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특히 한일합방으로 신분제가 붕괴되면서 족보의 간행은 더욱 활발해졌다. 일제시대 출판물 간행 1위를 족보가 차지할 정도였다. 말하자면 신분제의 붕괴로 그동안 신분제 때문에 족보가 없었고 족보에 등재되지 못했던 사람들이 모두 족보를 간행한다든가 족보에 편입함으로써 족보 간행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셈이다. 지금껏 전해지는 족보의 형태는 다양하다. 이 가운데 재미있는 게 袖珍本이다. 소매 袖가 들어간다는 것은 소매 속에 넣고 보는 휴대용의 족보라는 뜻이다. 보통 한 가문에서 대동보 한번 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동성동본의 모든 동족을 총 망라하려니 양도 방대할뿐더러 경비 또한 만만찮다. 그래서 나온 게 같은 派별로 묶은 派本이고 수질본이다. 수질본은 대동보나 파보의 내용 중 직계부분만 추려서 베껴 쓴 족보인데, 차 교수는 이것을 가첩이라고 부른다. 그는 수질본을 많이 갖고 있다. 소매에 넣게 돼 있으니 작고 앙증맞다. 그 조그만 공간에 한 집안 혈통의 내력이 담겨있는 것이다.

차 교수가 갖고 있는 수질본 가운데는 언문(한글)으로 쓰여진 족보도 있다. 딸이 시집을 간다고 어미가 딸을 위해 소중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차 교수는 수질본 말고도 왕실족보를 비롯해 귀중한 족보 사료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그 수집과정은 일견 재미있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모두 족보를 아무런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인식했던 탓이다. 재미있는 일화 몇 가지. “강릉의 고서점을 갔더니 엄청난 족보가 쌓여 있었다.

 

▲ 여러 가문의 수질본 족보들

 

저거 뭐냐고 했더니 낙질본이라고, 두 세 장 떨어진 것이라고 했다. 누가 사가느냐고 물었더니 표구상에게 한 권에 5천 원씩에 판다고 하더라. 억장이 무너져서 만원씩 쳐주며 다 샀다. 그랬더니 서점 주인이 전국 낙질본을 다 모아서 전화를 걸어온다. 이 게 일백 권이면 100만원 아닌가. 15년 째 지금까지 그랬다. 들어놓았던 적금, 보험 다 깨서 샀다. 그러다 끊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전화가 왔는데 누가 쓰레기통에 족보를 버려놨다고 했다. 갔더니 김해김씨 족보인데 스물다섯권이나 됐다. 젊은 친구가 자기 아버지 죽고 집 정리하다 궤짝이 나왔는데 그 안에 있었다. 젊은 친구는 냄새 난다고 그 걸 통째로 쓰레기통에 버린 것이다. 버려진 족보책은 음식찌꺼기와 온갖 쓰레기들로 범벅이 돼 있었다. 그 걸 가져와 닦아서 말렸다.

이건 불과 5, 6년전 얘기다.” “강릉에 어떤 사람이 전화를 통해 족보를 팔겠다고 했다. 안 산다고 했더니 집요하게 전화를 해 할 수 없이 네 권에 10만원 주고 샀다. 그런데 그 무렵 태풍 루사가 강릉을 덮쳤다. 하루에 800mm의 비가 내렸다. 그 족보가 있던 집 위에 저수지가 터지면서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족보를 보면 지금도 족보를 살리려는 조상의 의지가 느껴지는 것 같아 섬뜩해지곤 한다.”

지방 사학자의 우직한 ‘황소걸음’
경북 포항 출신인 차 교수는 경북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했다. 그리고 미국 UCLA에서 교환교수도 했다. 현재 강원대 삼척캠퍼스 인문교양학부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사학 전공으로 족보를 연구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나의 학위논문이 ‘조선후기 閥閱연구’다. 벌열 연구를 하다 족보 쪽으로 관심이 간 것이다. 문벌가문인 벌열은 한마디로 양반 중의 양반으로 조선후기 지배층이다. 인조반정이후 벌열이 형성되는데, 그 정점이 바로 안동김씨와 풍양조씨다.

이들이 어떻게 구성됐나를 들여다봤는데 족적기반이 그 한 보루였다. 족적기반의 중심이 무엇인가. 바로 족보 아닌가. 그래서 족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됐다.” 조선후기 지배층인 벌열의 사회적 기반은 크게 두 가지로, 서원을 통한 학맥과 족적이 그것이라는 게 차 교수의 시각인데, 족적을 살피다가 불가피하게 마주치는 부분이 족보였다는 얘기다.


이런 설명을 하는 차 교수의 언변은 적극적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지방 사학자로서의 학문연구에 대한 불편과 불만도 묻어난다. 말하자면 지방대학 교수로서 중앙학계와의 소통이라든가 자료접근에 대한 그 어떤 것 같기도 한데 더 이상의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다만 족보 연구를 하고 있고, 오늘 그 분야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현재 처지의 일단도 지방교수에 대한 이러 저러한 제한 속에 한 방향만 파고든 성과가 아니겠냐고 슬쩍 흘리는 언급 속에 뭔가 강한 역설의 느낌이 묻어났다. 차 교수는 족보를 우리나라 역사알기 관점에서 그 중요성과 의미가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역사 중에 가장 중요한 게 가족사라는 것이다. 글로벌 시대에 가족사가 그렇게 중요한가.

“역사를 얘기하면 글로벌 시대라도 세계사만 강조하면 안 된다. 정작 가장 기본인 나의 역사를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가. 세계사보다 한국사, 한국사 보다 지방사, 지방사 보다 가족사다. 가족사가 모여지면 그것이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지방사, 한국사, 세계사가 된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나라 역사는 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나의 역사가 기록된 일기장, 내가 터전을 잡고 사는 지방의 역사인 지방사가 그래서 중요하다. 집안의 역사가 적힌 족보도 당연히 그렇다.”

족보 중요성의 연장선상에서 차 교수는 국사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고, 한국과 한국인으로서 현재 국가와 나의 미래의 행동방향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게 바로 국사공부라는 것이다. 차 교수는 “역사는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로 나아간다. 단순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역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의 집약으로 이루어진 현재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라며 단언한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모른다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없다.”

강릉=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t

출처 :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7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