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내용은 네이버에 실린 우리의 자랑스러운 일족인 김호철 감독에 관한 기사입니다.
인터넷 서핑중에 발견하여 기쁜 마음으로 소개합니다. 운영자 주

NAVER 출처 http://navercast.naver.com/korean/sportsperson/258

한국인배구감독 김호철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을 어린 나이에 그것도 혼자 뛰는 게 쉽지 않았죠. 물론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죠. 학교에선 육상단을 만들겠다고는 했지만, 팀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육상팀이 만들어졌다면, 그리고 트랙을 계속 달렸다면, 지금 난 뭘 하고 있을까요?” 체육관도 없던 그때 운동장에서 지루하게 달리기를 하던 소년에게 하얀 공이 굴러왔다. 그 공을 주워서 갖다 주고 보니, 코트를 사이에 두고 공 놀이하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배구공과 이런 우연한 만남이 그의 인생을 180도 바꿔 준 계기가 됐다. 육상이 싫어 꾀가 난 소년은 아버지에게 배구를 해보겠노라고 했지만, ‘단체경기로는 밥 벌어먹기 어려우니 육상을 계속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초등학교 5학년의 김호철은 아버지와 신경전을 벌이며 육상과 배구, 둘 다 하기 시작했다.


배구팀에 처음 들어간 김호철은 키가 1m48cm에 불과했지만, 점프력이 좋아 레프트 공격수를 맡았다. 운동신경이 좋았으니 팀 적응도 순식간이었다. 달리기 외에 넓이뛰기까지 했었으니 점프력은 최고였다. 6학년 1학기를 마치고는 갑자기 학교를 그만둬야 할 일이 벌어졌다. 당시 밀주초등학교는 육상 라이벌 밀양초등학교와 경쟁 관계였다. 김호철이 졸업하고 나면 그 학교엔 뛸 선수가 없어질 형편이었다. 학교 측은 생일을 바꿔 1년 더 다니도록 아버지와 협의를 했다. 그래서 김호철은 1월13일인 생일을 11월13일로 바꿨고 이듬해부터 두 번째 6학년이 됐다. 밀양중학교에 입학해선 배구만 했는데, 키가 작아 그때부터 세터가 자신의 포지션이 됐다.

 

김호철은 중학교에선 ‘부정선수’로 발각되는 해프닝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중2 때였다. 밀주초등학교가 서울 서대문에 있던 대신중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서울배구대회에 출전했다. 성적에 과욕을 부린 밀주초등학교는 예선전을 하다 성적이 여의치 않자 김호철을 급히 상경시켰다. 예선전에서 뛰지 않던 김호철을 갑자기 투입하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상대팀이 문제를 제기했다. 부정선수로 적발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뛰어난 배구 실력 탓에 대신중학교는 김호철을 놓칠 새라 스카우트했다. 김 감독은 “육상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고교 2학년 때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기 전까진 한 번도 배구장을 찾지 않았다”고 했다. 이모가 살던 서울 마포구 공덕동이 유학생활의 첫 터전이 됐다. 김호철은 대신중학교로 전학을 하고도, 초등학교 때처럼 운동을 더 시키려는 학교 측의 계획에 따라 2학년을 한번 더 다녀야 했다.


중학교 땐 키가 자라 졸업할 당시엔 1m76까지 컸다. 그 키가 김호철 감독의 지금의 키다. 중학교에선 장신세터로 소문이 났지만, 고교 이후부턴 키가 크질 않아 졸업할 땐 어느 새 단신세터가 돼 있었다. 그는 “왼손잡이에다 장신센터였으니, 중학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었다”며 “당시엔 배구가 포지션별로 전문화돼 있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소화했었는데, 그러다 보니 테크닉이나 기본기는 지금보다 기량이 훨씬 우수했던 것은 분명했다”고 회상했다. 중학교에서 기량을 인정받은 김호철은 바로 대신고로 진학했고, 고교시절은 배구선수로서는 순탄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야말로 장래가 보장된 촉망한 기대주였으니, 한양대에 입학한 1975년 마침내 생애 처음 태극마크를 다는 영광까지 찾아왔다.

 

1976년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해였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한국 남자배구는 예선전을 거뜬히 통과했다. 하지만, 본선 무대는 진출권을 따냈던 김호철 같은 젊은 선수들의 차지가 아니었다.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이유로 노장들이 출전했다. 당시 여자배구는 한국 구기종목 사상 최초의 동메달을 획득했지만, 김호철이 빠진 남자배구팀은 입상에 실패했다. 김호철이 대표팀의 완벽한 주전 세터가 되기까진 그 뒤 2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1978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은 배구선수 김호철의 인생을 또 한번 바꿔놓는 무대가 됐다. 그의 현란한 토스워크에 힘입어 한국이 4위라는 쾌거를 달성하자 이탈리아 언론이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언론들은 일제히 “원숭이라 나무에서 재주를 부리는 것 같다”며 한국팀의 선전을 전했다. 김 감독은 “체격과 신장에서 불리했던 한국으로선 이동과 컴비네이션으로 빠르게 움직이며,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유럽을 상대했었는데, 그게 먹혔었다”고 첫 국제대회 출전을 회상했다. 김호철은 그리곤 급기야 대회 도중 이탈리아 클럽팀으로부터 이적 제의까지 받았다. 그의 이탈리아 진출은 그로부터 3년 뒤 성사됐다.


한양대 시절 국가대표까지 겸하면서 최고의 명세터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그는 국내 무대에서도 대접받는 선수였다. 특히 1977년 김호철 세터를 비롯해 강만수 이성규가 버티던 한양대는 당시 독무대를 호령하던 금성통신을 박계조 배에서 확실하게 꺾는 상승세를 이어갔다. 결국 국내 최고의 실업팀 금성통신은 이들을 모두 스카우트해 실업 전성기를 열기 시작했다. 1980년 금성통신에 입단한 김호철은 국내 대회에서 거의 모두 우승하는 저력을 발휘해 마침내 이듬해 해외 진출의 꿈을 이뤘다.

 

김호철은 연봉 5천 달러(540만원), 계약금 1만 달러(9천만원)라는 좋은 조건으로 이탈리아 파르마 클럽에 진출했다. 그는 “당시 국내 연봉이 200~300만원 할 때였다. 진출 첫해 팀을 우승시키자 다음 해 연봉이 배로 올랐다. 계약기간도 2년 더 연장됐다”고 했다. 첫 이탈리아 진출에서 팀 우승 2번, 마지막 해엔 유럽챔피언까지 차지했다.

 

김 감독의 말이다. “언어가 통하질 않아 손가락 사인을 그린 종이에 복사해서 이탈리아 선수들에게 나눠주면서 작전을 구사했다. 외국은 그때나 지금 모두 통역은 없고, 생활도 혼자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김호철로서는 그나마 결혼을 하고 출국했기에 생활에 안정감을 찾는데 덜 어려움을 겪었다. 아내 임경숙씨와의 만남은 태릉선수촌 입촌 생활에서 비롯됐다. 여자부 도로공사 출신의 국가대표였던 임경숙씨는 선배의 갑작스런 은퇴로 공격수에서 갑자기 세터로 보직을 바꿔야 했고, 당시 최고의 세터였던 김호철의 개인코치를 받게 된 것이다. 3년 간의 입촌 생활 속에서 마음이 통한 둘은 81년 결혼에 성공했고, 그 해 이탈리아로 진출해 해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이탈리아에서 선수로 명성을 날리자 국내 무대가 가만둘 리 없었다. 정주영 회장의 후원아래 1983년 현대자동차서비스가 현대자동차서비스를 창단했다. 하지만 첫해 5관왕의 위업을 달성하고도, 이듬해 원년 대회인 대통령 배에서 경기대에 일격을 당하며 주저앉았다. 송만기 초대 감독은 결국 김호철을 연봉 5천만원에 불러들였고, 그 해 2개 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팀을 정비해 1986년 대통령배 우승 등 3관왕을 차지하며 명예를 회복했다. 국내와 해외에서 명성을 확인한 김호철은 다시 1987년 이탈리아로 재진출해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했다. 1995년엔 자신의 이탈리아 첫 진출팀 파르마 클럽의 감독 제의를 받아들여 지도자(감독)로서 첫 출발을 했다.

그런데 처음 맡은 지도자가 결코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김 감독은 “그 때가 내 생애 최대의 시련기였다”고 했다. 이탈리아 생활에 적응도 했고, 일상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대화엔 불편함이 없었지만, 지도자로서 구사해야 할 언어가 따로 필요했고, 선수들의 심리상태를 파악하거나 보살피는 것은 현역 때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던 것이었다. 김 감독은 그때를 이렇게 표현했다. “우린 감독이 선수들에게 시키면 그냥 따라 하지 않습니까. 그쪽은 달라요. 왜 그렇냐고 하나하나 되묻는데, 그걸 다 설명해 주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지요.” 당시 구세주는 팀 코치였는데, 김 감독의 얘기를 미리 자세히 듣고, 연습스케줄을 모두 짜 선수들에게 대신 설명해주는 역할을 기꺼이 맡아줬다. 그런 1년의 수습기간이 지난 뒤에야 김호철은 마침내 제대로 된 감독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명문 4개 팀을 옮겨 다니며 감독으로서도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꼭 20년 만인 2005년 국내에서 선수로서 마지막 몸담았던 친정팀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의 사령탑으로 복귀했다.

 


김호철은 스스로를 “개천에서 용났다”고 표현했다. 배구가 시골소년을 서울로, 국가대표로, 이탈리아 진출로 끊임없이 그의 세계를 확장시켜 준 것이었다. 심지어 그의 결혼도 배구가 인연을 맺어줬다.

“김호철 인생에서 배구를 빼면 아무것도 없다”는 그는 “아직도 배구 생각만 하면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생기가 돋는다”고 했다. 국내 복귀 뒤 현대캐피탈의 우승을 두 번이나 일구며 명감독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보람은 단지 성적만은 아니었다. 김호철 감독은 “내가 복귀할 때만 해도 우리 팀은 모래알 같은 조직이었다. 그런데 이제 선수들의 태도가 바뀌고 있고, 우승도 해서 자부심도 갖게 됐다. 그러는 사이, 내게 나쁜 별명은 모두 붙어 다녔지만, 개의치 않았고 지금은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한 팀에 너무 오래 있으면 선수나 감독 모두에게 안일함을 줄 수 있다며 스스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그는 기회가 된다면 배구계 발전을 위해 어느 팀이든 어떤 직책이든 마다하지 않겠다고 했다.

‘마술의 손’ ‘컴퓨터 세터’ ‘황금의 손’ ‘점프 캥거루’ 등 현역시절과 감독을 거치며 수많은 닉네임을 얻는 김호철 감독. 그는 배구를 “진실된 인생을 살아가는 진솔함이 그대로 묻어있는 세계”라고 표현했다. 그는 “다른 스포츠가 그렇듯이 이길 때도, 질 때도, 어려울 때도 있지만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게 결국 인생이 아니냐”고 했다. 부모의 영향을 받아 자식들은 모두 운동을 하고 있다. 딸 미나(25)씨는 이탈리아 프로배구 2부 리그 선수로, 이탈리아 국가대표 골퍼 아들 준(21)씨는 올해 유럽프로골프 무대 문을 두드리고 있다. 자식들 뒷바라지를 위해 이탈리아엔 아내 임경숙씨까지 남아있다. 게다가 최근 김호철 감독에겐 이탈리아 프로팀의 러브콜이 날아오고 있다.  배구의 한 시대를 국내외 무대에서 풍미한 그의 활약은 아직도 그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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