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심묘기(大峴尋墓記)

  아래의 글은 1976년도에 발간된 '영헌공실기역해(英憲公實紀譯解)'라는 책에서 심묘(尋墓)에 관한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문구(文句)가 요즘 사용하는 문구와 다른부분이 많으나 예전에 발간된 책이고, 한문역해의 부득이한 사정임을 양해바랍니다. -운영자

  처음으로 대현산소를 찾아서 수보하니라○선생의 무덤을 잃고 상고하지 못하니 대개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얼마되지 않아서 세상이 뒤바뀌고 난리를 겪게 되었으므로 자손들이 국사(國事)에 노고하고 벼슬길에 바빠서 각처에 흩어졌기 때문에 난리가 지난뒤에 알 수 없게 되어 전하지 않더니 이에 이르러 후손 사일(思馹)이 대현리(大峴里)에 살아서 일찌기 노인들의 말을 듣고 금능동의 한 큰 고총에 의심을 품고 묻은 빗돌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지난해 겨울에 무덤곁을 파헤치고 찾다가 송사를 만나서 옥에 갇히고 그 숙부(叔父) 덕량(德亮)이 사일의 아들 원손(元孫)을 데리고 다시 무덤을 헤치고 지석을 찾더니 회(灰)가 돌과 같이 굳은지라 회를 깨뜨리고 보니 광의 동쪽(壙東)에 회함이 있어 그 가운데 명기(明器) 여섯가지가 있으니 기일(基一)은 매죽연벼루니 못이 반달과 같고 왼편과 바른편에 매화와 대를 새겼는데 마치 피어남과 같고 기일(基一)은 용뇌묵이니 다만 모양만 있어서 만지면 부서지려하고 기일(基一)은 은합이니 둥글기가 박과 같고 뚜껑에 깨어진 곳이 있고 자루에 영오산(英鰲山) 세글자를 새겼고 기일(基一)은 은저이니 모양이 지금의 저(箸)와 같고 두짝에 다 영오산 三字를 새겼고 기일(基一)은 은숟갈이니 자루의 끝이 연방(蓮房)이 펴지 않음과 같고 숟갈의 잎이 길고 좁으며 왼편에 닳은 흔적이 있으니 평일 쓰시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고 기일(基一)은 백병(白甁)이니 가운데 술이 있으나 다만 그 냄새가 없고 병마개를 단향(檀香)으로 하였는데 만지면 사라져서 마치 찹쌀가루와 같더라 그때 마침 섣달그믐인데 갑자기 뇌성이 일고 비가 크게 오니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더라 이에 영오산(英鰲山) 세글자로 선생의 시호(諡號)와 봉호(封號)의 밝은 증거를 삼아서 이 해(庚戌) 정월로부터 자손된 모든 종중에서 소송을 일으키어 군(郡)과 부(府)에 보고하여 판결을 보고 비로소 봉수(封修)하고 위안(慰安) 고유까지 하였더니 十월에 또 상고(上告)를 입어서 도사(道査)로 광을 열게하자 뇌우(雷雨)가 또 크게 나리니 사람들이 더욱 이상하게 여기더라 다시 명기와 광중(壙中) 척도(尺度)를 심사하여 두 번째 도백(道伯)의 결안을 얻어 부(府)로부터 상문(上聞)하여 완문(完文)을 받고 이에 환봉(還封)하고 위안고유(慰安告由)하니라.

                                                                                                                                                            김갑룡(金甲龍),『영헌공실기역해』, 청도김씨대종친회사무소, 1976, pp.19-20.)